공연 포스터에 그림 한번 그려보시겠어요?

복사꽃 지고 송화 날리던 어떤 날들의 기억

by 강마레

"공연 포스터에 그림 한번 그려보시겠어요?"


정중한데, 뭔가 강압적이면서도 익숙한 제안. 몇 해 전 “옥룡설산 그림 필요해! 거기서 공방을 열거니까”라고 당당하게 그림을 의뢰(요구?)했던 친구 C만큼은 아니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휘몰아침으로 와닿았다.


특히나 요즘 자아가 비대해져 거의 모든 일에 '뭐 한번 해보지 뭐'를 연발하는 나였기에 “그럴까요”라는 대답이 어색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연극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의 공연 포스터 그림 작업.


포스터 속 그림을 의뢰(?)받았기에 작품의 이해를 위한 극본을 전달받았다. 40p 남짓한 대본에는 빼곡히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그 사이의 질곡한 시간이 담겨 있었다.


경주 외곽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50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 그들 곁에 머무는 이웃과 아들, 그리고 '인연'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스쳐갔을 어떤 봄날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봄날의 은유처럼 꼭 행복하거나 따뜻하고 포근하지만은 않다.


이 연극은 손기호 작가가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2011년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대구, 안동, 영주 등 여러 지역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나며 꾸준한 재공연을 이어왔고, 오는 7월 24일과 25일 울산 아트홀 마당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다른 지역에서 공연된 앞선 포스터들을 살펴보니, 계절적 배경인 벚꽃이 흩날리고 등장인물인 노부부와 이웃들의 모습이 담겨 있거나 화려한 캘리그래피로 제목인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가 쓰인 형태가 많았다.


내가 극본을 읽고 포스터에 담고 싶었던 것은 인물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삶이었다. 계절적 배경은 봄이고, 마당엔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늦봄에야 피는 복사꽃도 지고, 다시 송화가 날리는 봄날의 향연도 이어진다. 극 중에 어머니는 나물을 다듬으면서도 같이 뜯어온 들꽃을 머리에 꽂곤 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의 삶은 지난하다.


젊은 시절 과부가 되어 곡절 있게 살아왔으나 이제 죽음을 앞둔 한 여성의 삶과 이제는 그 어르신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또 다른 여성의 돌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웃여자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삶의 지근함이 가슴에 턱턱 부딪쳤다. 물론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무책임하기도 하지만 지쳐 보이는 아들, 가정폭력범인 전직 군인인 이웃남자도 안타까웠지만 말이다.


며칠 동안 어떤 이미지로 이 연극이 관객들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은 조지아 오키프의 ‘흰 독말풀’이었다. 몇 해 전 나는 오키프의 흰독말풀을 유화로 모작했었다.

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세계 여성 화가 중 최고 작품 가격을 기록한 인물이지만 그 가격조차 남성 작가 최고가의 절반에 불과하다. 오키프는 꽃을 거대하게 확대해 그린 이유를 "꽃을 작게 그리면 아무도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며 "꽃을 거대한 스케일로 그리면 그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연극 포스터는 꽃을 확대해 화면 가득 담아낸 오키프의 시선처럼, 나 역시 복사꽃의 형상을 크게 담아 사람들의 눈을 붙잡고 싶었다. 꽃잎 하나하나에 삶의 사건과 아름다움과 시간을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꽃은 그동안 '작게' 취급되어 온 여성들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는 이 연극의 취지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가정 내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여성들의 고통과 희생에 시간을 들여 주목하게 만드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오키프의 회화방식을 오마주해서 복사꽃 한 송이를 포스터 가득 담고자 했다. 꽃잎의 일부가 포스터 밖으로 나갈 정도로 가득 채운 구성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기를.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의존적 삶과 침묵, 며느리의 돌봄, 그리고 가정 폭력에 노출된 서면댁의 고통까지. 일상 속에서 은폐되거나 축소되어 온 여성들의 경험을 확대경 아래 두고, 그 안의 깊은 감정과 의미를 발견하도록 말이다. 물론 연극에는 아버지나 아들의 서사도 있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여성 서사에 집중하는 전략이랄까. 그리고 여성들의 봄이 그들의 봄에도 가 닿을테니.


또 기존 포스터가 '보는' 경험이었다면, 이번 포스터는 '들여다보는' 경험으로 전환되기를 희망했다. "꽃을 손에 들고 정말로 들여다보면, 그 순간 그것은 당신의 세계가 됩니다"라는 오키프의 말처럼, 관객들을 꽃 안으로, 여성들의 내밀한 감정 속으로 끌어들이는 포스터가 되기를.


봄은 피어나며 지고, 인연은 피었다가 어느샌가 잎맥처럼 흔적만 남는다. 복사꽃이 지고, 송화가 날리는 이 계절. 나는 이 연극이 말하는 조용한 깨달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고 환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포스터도 환하게.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무대 위엔 삶의 찬란한 한순간들이 피어날 테니.


이런 취지를 담는 스케치를 프로듀서에게 보내고 연출가를 비롯한 배우들에게도 의견을 들었다. 큰 한 송이 꽃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기로 했지만 제목에도 등장하는 꽃, 계절적 배경이 된 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아이패드의 프로크리에이터로 작업을 진행했는데, 복사꽃의 특징이 드러나는 꽃잎의 입맥이나 섬세함을 수채화의 번짐과 겹침을 통해 감정과 시간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투명한 레이어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색감의 변화는 여성들의 겹쳐진 삶과 기억을 자연스럽게 시각화할 테니까.


물의 흐름처럼 감정을 담고 싶었다. 촉촉한 번짐으로, 은은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상처받은 여성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이를테면 서면댁의 은밀한 고통이나 어머니의 말 못 할 아픔을 물의 흐름과 번짐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복사꽃의 부드러운 질감 속에 숨겨진 강인함도 섬세하게 구현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하지만 포스터를 오키프 스타일의 큰 꽃 그림으로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연극의 제목과 일정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포스터로 재탄생하는 일은 또 다른 영역이라 프로듀서, 디자이너와 함께 더 나은 방안을 찾아갔다. 제목은 물론, 시간과 장소, 작가와 연출, 프로듀서, 배우들의 이름, 그리고 주최와 후원도 기록해야 하니까.

그리고 마침내 공연 당일. 파일 형태로 보던 포스터와 달리, 실제로 공연장 로비에 붙어 있는 포스터나 관객들이 손에 든 리플릿 속 복사꽃은 또 다른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본을 다 읽고 접한 연극 공연임에도 무대는 새로웠다. 극본 속 할머니는 직접 등장하지 않고 무대 뒤편에서 누워계신 형태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그 부재의 존재감이 오히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할머니를 돌보는 며느리가 방을 드나들며 보여주는 지친 몸짓, 대소변을 받아내고 나오는 모습에서 극본으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현실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서면댁의 극적인 연기는 놀라웠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여성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웃으면서도 움츠러드는 어깨,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 그리고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절절한 감정까지. 내가 복사꽃 꽃잎의 번짐으로 담으려 했던 그 미묘한 감정의 층위들이 배우의 온몸을 통해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상 깊었다.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스며 나왔다. 아들은 나 홀로 따로 뭔가 환상에 시달리거나 독백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심하고 있다는 건 느껴졌지만, 그 독백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대 위에서 계절이 흘러갔다. 봄의 끝자락, 복사꽃이 지고 송화가 날리는 그 시간들이 인물들의 감정과 겹쳐지면서 묘한 쓸쓸함을 자아냈다. 극 중에서 어머니가 나물을 다듬으며 들꽃을 머리에 꽂는 장면은 관객석을 웃게 만들었지만, 그 웃음 뒤로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스며들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내가 그린 포스터가 과연 이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아 오키프의 큰 꽃처럼 여성들의 삶을 확대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가 무대 위의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한바탕 굿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슬픈 이야기였지만, 슬픔으로만 남지 않기를. 봄은 늘 그런 방식으로 지나가니까. 복사꽃이 지고 송화가 날리는 그 봄처럼. 혹 포스터를 보면 복사꽃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배경이 되는 노란 톤이 송화라는 사실,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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