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슬도가족'

우리가 스쳐 지나간 풍경 뒤에 숨어있던 이야기

by 강마레

"설로도 와! 설도"


몇 해 전, 울산 동구 방어진항에서 열린 행사에 업무차 간 적이 있다. 행사가 끝난 뒤 관계자가 내게 말했다.


"설도 갑시다. 보여줄 게 있어요."


내비게이션에 '설도'를 아무리 입력해도 나오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설도요? 네비에 안 나와요."


전화기 너머에서 "설도, 설도!"를 연발하던 그때, 지나가던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거, 슬도를 말하는 거구만은."


내게 슬도의 첫 기억은, 그렇게 웃픈 '설도'였다.

혼자 본 첫 연극


연극 <슬도가족>을 보러 나 홀로 장생포문화창고를 찾았다. 혼자 영화를 본 적은 가끔 있었지만, 연극은 처음이었다.


내가 울면 어쩌지? 괜히 혼자 손뼉 치면 이상하게 보이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까 그런 건 다 잊혔다. 아무도 내 얼굴 안 보잖아. 오히려 더 솔직하게 볼 수 있었다.


슬도와 솔숲 동굴 사람들


<슬도가족>은 대왕암공원 근처 작은 섬 슬도와 그 일대 사람들을 모티브로 한 창작극이다.


마도로스였으나, 부동산 중개인이었으나, 가수였으나 인생의 풍랑을 맞고 울산대공원 솔숲 한켠 동굴에서, 또는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졌다.


그중 가수였던 중년 여성은 고향으로 돌아와 슬도 앞에서 '슬도카페'를 운영했으나 사기를 당해 지금은 인근에서 관광객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며 살아가고, 부동산 중개업을 했던 또 다른 여성도 노점을 한다. 버스킹을 하며 살아가는 가수지망생인 젊은 여성도 있다.


이들은 구청과 해경의 단속을 두려워한다. 쉬고 잠들 자리조차 없는 불안한 삶. 사실 상상조차 못 했던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삶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느끼는 불안을 나는 상상조차 못 했다.


모든 사람이 노래하는 무대

이 연극은 자꾸 사소한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그리고, 유난히 노래 부르는 장면이 많았다.


물론 전직이 가수인 인물도 있고, 버스킹이 직업인 이도 있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성악과를 나와 구청 계약직으로 일하는 청년도 있었다. 연극영화과를 나와 오디션만 보고 있는 젊은 여성, 그리고 음치 캐릭터까지. 이들은 팍팍한 삶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결국 이 무대에서 노래를 안 한 사람은 관객뿐이었다. 그마저도 잠깐. 나도 버스킹 장면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따라 불렀고, 〈무인도〉를 따라 부르다 괜히 목이 메었다. 혼자라서일까. 이런 감정이 더 깊이 각인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가 참 좋았다. 대사 하나, 표정 하나에 삶이 묻어 있었다. 슬도의 바람과 소금 냄새가, 그들의 몸짓과 숨결을 타고 객석까지 흘러온 듯했다. 어색하거나 과장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달까. 그래서 더 마음이 저렸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그 사람들을 이 무대 위로 데려와줘서 고마웠다.


고래 대신 사람 이야기가 들어온 곳


장생포문화창고는 옛 창고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고래잡이로 이름을 알렸던 장생포가 이제는 고래 대신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담는다. 쇠락한 산업의 기억 위에 예술을 세운 장소라 더 기대됐다.


높은 천장과 투박한 벽, 창고 특유의 공기는 솔숲 동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친 삶과 닮아 있었다. 무대와 객석이 가까워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바닷소리를 담은 음향과 파도를 연상시키는 조명은 마치 객석도 슬도의 일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연극을 스무 명 남짓한 관객만 보고 있다는 게 괜히 아쉬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 무대를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공연 내내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박수를 치고 웃었다. 때론 울었다. 연극이 끝날 무렵, 객석과 무대가 하나가 된 듯한 따뜻함이 극장 가득 번졌다. 고래를 잡던 곳에서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낚는다.


연극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이야기


연극이 끝나 극장을 나서는데 몸이 괜히 무겁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무대에서 숨 쉬던 것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나는 그것들을 오래 곱씹었다.


지난봄 옹기축제에서 내가 직접 극본을 쓰고 무대에 올렸을 때도 그랬다. 한참이 지나도 자꾸 대사들이 귀에 맴돌았다. 지금은 다른 작품의 포스터를 그리며 살지만, 다시 누군가의 이야기에 잠기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객으로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솔숲 동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울산에 살면서도 늘 그냥 지나쳤던 풍경들...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들으려 했을까. 구청이랑 해경 단속 무서워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사람들. 어딘가에는 이런 현실도 있을 텐데, 나는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때론 버겁고, 때론 무겁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찾는 이해와 사랑, 용서를 이 사람들이 보여줬다. 피 안 섞여도 같은 공간에서 서로 돌보며 사는 사람들.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봤다.


설도가 슬도가 되었던 것처럼


<슬도가족>을 보고 나서, 이 연극을 울산 사람들에게, 그리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었다. 이건 단순히 지역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족과 고향,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니까.


설도가 슬도였던 것처럼,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 이야기들을 찾아 듣고,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연극이 주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


바다가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 밤 나는 아마 꿈속에서도 슬도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울산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바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울산의 야경이 전과 다르게 보였다. 저 불빛 하나하나 뒤에도 누군가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연극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무대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 그들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 여전히 생생하다.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삶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인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극 <슬도가족> | 울산 장생포문화창고 | 2025.07.03 목요일 19:00 | 약 70분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