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희곡의 따갑고 뜨거운 기억
연극의 시작은 희곡이다. 문학의 3대 장르 중 하나라지만, 희곡은 시나 소설에 비해 접근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무대 공연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 소설과는 꽤나 다른 장르의 문학이었다. 문학이론에서 배운 것도 같지만 막연했는데, 이번에 실전적으로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세계문학전집에서 희곡작품을 읽는, 즉 문학 텍스트로서의 희곡을 읽는 것과 연극으로 공연되는 희곡은 완전히 다르다. 직접 쓴 시나 소설을 인쇄된 형태나 출간된 형태로 읽는 것과도 그 목적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독자가 혼자 읽는 문학이 아니라 관객 앞에서 “지금 이 순간” 실현되는 문학이 바로 희곡이자 곧 연극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조승우가 부른 “지금 이 순간”처럼 바로 ‘지금’ 존재하는 ‘배우’가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작가가 모니터에 적어 내려간 글자들이, 마법처럼 살아 움직이는 공연이 된다니?!
그렇다. 연극의 재미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배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작가의 지문을 따라 완성되는 무대 세트, 그리고 배우를 이쪽저쪽으로 옮겨가며 연출가 마냥 구성을 짜보는 일. 손에 쥔 대본이, 숨 쉬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쁨. 나는 그 맛을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2025년 울산옹기축제 둘째 날 열리는 무용극 ‘울산을 품은 옹기‘는 옹기가 흙에서 빚어지고, 바람을 통해 건조되고, 불에서 익어, 숨 쉬는 그릇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무용극에서 나는 무용과 무용을 연결하는 짧은 극을 구성하는 세 배우의 대사와 지문을 썼다. 무용극이 1시간 남짓이고, 막과 막을 연결하는 연극은 4차례니까 연극만으로는 약 20분 정도의 분량이었다.
연출자와 공연기획자로부터 해당 주제의 공연에 극을 함께 작업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옹기에 관해 많이 찾아보았다.
숨 쉬는 그릇인 ‘옹기’와 숨 쉬는 극인 ‘연극’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소설이나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말을 위한 말’을 만들고, 서로 ‘주고받는 말’을 이어가는 일에 빠져들었고,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잊고 있던 뭔가를 쓰고 싶다는 갈증이 해소되기도 했고 그 덕분에 연재형 소설을 시작할 수도 있게 되었다.
지난 4월의 어느 날. 울산을 품은 옹기 대본을 연출자에게 건넨 뒤, 첫 리허설 겸 연출과 배우들과의 상견례를 위해 연습장을 찾았을 때, 엘리베이터를 내려 신발을 벗으려던 순간. 갑자기, 내가 썼던 문장이 한 배우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우렁차게 튀어나왔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너무 놀랐고, 부끄럽다가, 신기하다가, 가슴 깊은 곳이 파르르 떨리는 체험을 했다. 모니터 속 조용했던 문장들이, 누군가의 숨결과 몸짓이 되어 공간을 울리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목격했다.
그날에야 나는 깨달았다. 연극에서는 내가 쓴 말들이 진짜로 '살아난다'는 것을. 그리고 수천 년 이어온 연극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이다.
실제 공연은 옹기마을축제가 열리는 5월 4일 일요일 오후 13시 30분에 메인 무대에서 열렸다. 외고산 옹기마을축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대표적인 지역 축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역사적이면서도 생기 넘치는 시공간이다.
울산을 품은 옹기의 실제 공연은 연습실에서 최종 연습과 리허설과는 꽤 달랐다. 큰 야외무대 위에서 무용수들의 화려하고도 극적인 표현은 인상적이었고, 이어진 옹기 장인을 맡은 김대영 배우의 “태초에 강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하고 근사했다.
<울산을 품은 옹기>를 여는 내레이션
태초에 강이 있었습니다.
강물은 산을 품고, 바다를 향해 흘렀지요.
그 물결을 따라 천년의 시간이 흘렀고
강변에 쌓인 흙은 우리 손을 기다렸습니다.
처음엔 그냥 물소리인 줄 알았어요.
근데 계속 듣다 보니…
그 안에 숨이 있었어요.
울산의 흙은 특별합니다.
조상들은 이 흙에서 비밀을 발견했지요.
물과 불, 바람이 시간을 만나면
평범한 흙이 ‘숨 쉬는 그릇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렇게 외고산 옹기마을은
천 년의 시간 동안 숨결을 이어왔습니다.
오늘, 그 숨결이 여러분의 이야기가 됩니다.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면 재치를 겸비한 아들 역의 김호성 배우가 관객들의 찰떡같은 호응을 이끌었고, 고추장 장인으로 분한 어머니 역의 김영희 배우의 연기는 자연스럽고도 매력적이었다.
흔히 영화는 대본과 연출이 80%, 배우는 20%로 감독이 카메라와 편집실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으로 본다. 영화는 촬영, 편집, 음악, 시각효과 등 다양한 후반 작업을 통해 완성되고 이 과정에서 감독과 제작진의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거기다 배우의 연기는 여러 번의 테이크 중에서 선택되고 편집되어 최종 결과물에 반영된다.
하지만 연극은 50% vs 50%로 오히려 배우의 예술로 불린다. 연극은 작가나 연출이 리허설에서 손을 떼면 배우가 다 만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극은 실시간으로 관객 앞에서 공연되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와 무대에서의 존재감이 작품의 완성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연 중에는 연출이나 기술적인 개입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배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울산을 품은 옹기’는 무용극 안에서 무용과 무용을 이어주는 ‘극 속의 극’으로 배우들이 인상적인 현대무용 직후 관객의 호응이나 감동을 나누는 역할을 하고, 이어질 무용에 앞서 정보를 제공하는 요소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머를 강조한 부분에 대한 배우의 표현력과 관객의 반응은 공연 내내 나를 긴장하게 했다.
모든 부족한 요소는 내 몫일테고, 김대영, 김영희, 김호성 내공 깊은 좋은 배우들 덕분에 부족한 내 첫 희곡이 빛났다. 이 무대의 감동을, 기억을 잊지 않고 계속 써나갈 것이다. 쓰고 보니, 연말시상식 수상후기 같지만 말이다.
공연날은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이었다. 야외무대 맨 앞자리에 앉아 호응을 겸한 관람을 하고 보니, 양팔이 쌔빨갛게 익어버렸다. 팔등은 짙게 붉고 뒤면은 하얀 완전 게맛살 형상이다. 진정팩을 계속 붙여도 며칠째 열기가 가시질 않았다. 아무래도 뜨거움을 잊게 한 공연 덕분일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옹기마을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이 만든 옹기를 하나 사 왔다. 내가 대본 속에 옹기 표면에 태화강의 물빛이 보인다고 썼던 그 모습 그대로 였다.
부엌 한 켠에 소금을 담아 넣어두었다. 이 옹기를 볼 때마다 따갑고도 뜨거웠던 첫 희곡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