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후 즐기는 환대, ‘일렁’ 탐방기

책과 음악으로 채우는 느긋한 휴식

by 강마레

영도를 아시나요? 봉래탕을 아시나요?

그렇다면 일렁은요?


카페 쿠폰처럼 열두 번 오면 한 번 무료,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대중탕, 모던하게 꾸민 탈의실과 향긋한 꽃병이 놓인 공간.


이제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때를 미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 부산 영도의 봉래탕과 라운지 일렁이 바로 그런 곳이다.


뜨거운 물에서 나온 몸이
재즈의 리듬에 스미듯 녹아든다.

그건 봉래탕 위층 라운지 ‘일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목욕의 연장선이다.


그림으로 담은 봉래탕의 환대


현 봉래탕 주인장은 ‘목욕탕집 2세’다.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서울에서 게임회사를 창립해 운영하다가 몇 년 전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들이 겹쳐 부산으로 향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욕탕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목욕탕 매거진 집앞목욕탕에 소개될 만큼 고객지향적인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집앞목욕탕 3호'에는 봉래탕의 ‘목욕탕 운영 분투기’와 함께 내가 그린 일러스트가 실렸다. 첫 장에 담은 봉래탕 전경을, 다음 장면들에는 손님들이 쾌적하게 즐길 탈의실의 공사모습, 음악을 들려주고, 꽃을 두고, 쿠폰을 챙겨주는 모습까지 담았다. 단순한 목욕탕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기분 좋게 드나드는 따뜻한 공간을 그리고 싶었다.

제가 그린 봉래탕 일러스트와 함께, 집앞목욕탕 3호에 ‘목욕탕 운영 분투기’가 실렸어요.

살림집이 감성 라운지 ‘일렁’이 되기까지


최근엔 봉래탕 주인장이 사용하던 5층 살림집이 목욕탕 라운지 ‘일렁’으로 재탄생했다. 공간 디자인과 운영은 집앞목욕탕을 출판하는 사이트브랜딩과 매끈목욕연구소가 맡았다.


라운지 일렁은 목욕탕 위층에서 즐기는 ‘쉼의 확장판’이다. 문을 열면, 살림집을 개조한 아늑한 입구가 나타나고, 손님은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그 순간부터 이미 목욕탕 특유의 편안한 공기가 켜진다.


안으로 들어서면 부드러운 쿠션이 있는 초록 의자와 편안한 소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은 책장에는 흥미로운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몇 권 사이에는 손님들이 남긴 메모가 숨어 있다. 빛이 스며든 벽에는 사진과 액자가 걸려 있고, 곳곳의 화분에서 은은한 흙냄새가 퍼진다.


헤드셋과 CD 플레이어에서는 취향대로 고른 재즈나 클래식이 흐른다. 따끈한 몸으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면, 시간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바닷바람이 살짝 스쳐 목욕 후의 후끈함을 식혀주는 순간, 하루가 비로소 완성된다.


이곳, ‘일렁’에서는
목욕의 끝이
어떤 시작이 된다.

목욕 후, 마음까지 일렁이다


라운지 메뉴는 세트로 구성되어 있고, 필터 커피와 파운드케익 쿠키는 물론 술도 즐길 수 있다. 가오픈 기간에는 작은 위트가 담긴 ‘때수건 선물’도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는 젊은 부부가 나란히 음악을 고르고, 한쪽 소파에는 모자를 눌러쓴 노신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안경 끝에 빛이 스친다. 또 다른 손님은 목욕 후 담소를 나누는 웃음이 오래 머문다. 이론 온기들이 공기를 감싸며, 일렁만의 공기를 완성한다.

‘일렁’이라는 이름은 파도나 빛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번져가는 감각을 뜻한다.


봉래탕이 몸을 씻는 곳이라면,
일렁은 마음을 헹구는 곳이다.


물결처럼, 방문한 이들의 하루를 살짝 흔들고 새로운 여운을 남기는 것. 목욕탕을 나설 때 몸만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일렁이도록 말이다.


그림 속의 하루, 잡지 속 장면


처음 일렁에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목욕탕 특유의 습한 공기에서 갑자기 마주한 북유럽 카페 같은 공간. 이 대비가 주는 묘한 감동...


봉래탕과 일렁은 현재진행형 실험이다. 그곳에서는 뜨거운 물과 시원한 바람이 만나 하루가 천천히 일렁인다. 라운지 한켠에는 집앞목욕탕 잡지도 비치되어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오래된 목욕탕들, 사라져 가는 공간의 기록,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목욕탕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잡지 속 장면이 된다.


깨끗해진 몸 위로,
마음 한켠에 번진 잔잔한 물결이 오래도록 남았다.

오늘의 하루는 그렇게 천천히,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