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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Feb 16. 2021

동지冬至

12.22.(양력), 태양 황경 270°

동지는 겨울에 이른다는 뜻의 절기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 과거에는 동지를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여 설로 지내던 풍습이 있었으며, 동지 무렵이 되면 연말연시의 선물로 새해 달력을 주고받았다. 동짓날의 대표적인 음식은 팥죽이다. 이날 팥죽을 쑤어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려 악귀를 쫓았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새벽까지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다 해가 뜨고서야 자리에 누웠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운 채 팟캐스트를 켰다.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우리들의 2020년’이라는 주제로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을 들려주었다. 코로나19로 달라져버린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김혜리 기자와 최다은 피디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그중 한 사연을 읽던 최다은 피디가 어느 순간 울먹울먹하더니 금세라도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그러나 꾹꾹 참는 목소리로 끝까지 사연을 읽는 대목에서 나도 그만 같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최다은 피디가 우는 부분에서 정확하게 같이 운다.)


사연은 한 택배 기사가 보내온 거였다. 외국계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2020년에 찾아온 코로나19로 기약 없는 무급 휴가에 접어들었다. 여름부터는 택배, 배달, 일용직 등을 전전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고 지금도 새벽 택배 배송을 하면서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팟캐스트를 듣는다고 했다. 힘든 시간 동안 함께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로 끝을 맺었는데, 짧고 담담한 사연이었는데도 글을 잘 썼기 때문인지, 그걸 읽어주는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선지, 사연을 듣는 내내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낀 채 택배 상자를 나르는 기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혹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무엇이었든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배송을 돕고 있는 모습이.


그 순간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나 역시 한쪽 귀로는 늘 이어폰을 꽂은 채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들었다. 책이나 작가와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찾아 들었다. 더 이상 들을 게 없으면 이미 들었던 것 중에 다시 듣고 싶은 걸 골라서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한쪽 귀로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라도 내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양쪽이 아닌 한쪽 귀로밖에 들을 수 없는 건 차마 현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어서라는 걸 모르지 않기에 그 택배 기사의 상황과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사연을 다 읽은 최다은 피디는 코로나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젊은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직종이 이 택배업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특별한 자격이나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고, 특히 요즘에는 수요도 많아서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초보이고 요령도 부족한데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일해야 하고, 일하다 다치면 그 책임 역시 혼자 져야 하는 구조. 피디의 물기 가득한 음성에 실린 안타까움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다. 뉴스에서 보도하는 내용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와는 다른 체감이었다.  


이밖에도 다른 사람들의 사연이 하나하나 기억난다. 영화를 좋아하는 재수생, 영화관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태프, 군복무를 마치고 이제 막 제대한 청년, 아이를 키우며 그림을 그리는 엄마, 하던 일을 멈추고 매일 아침 운동을 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또 다른 누군가…….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공간을 살고 있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2020년을 통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 또 하나. 모두 《김혜리의 필름클럽》 청취자라는 것. 내가 이 방송을 처음 듣게 된 경위를 떠올리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나처럼 무언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을 찾다가 알게 된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각자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내게 2020년은 매우 낯선 해였다. 생활 반경이 턱없이 좁아졌지만 의미 반경은 무한정 커졌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같은 처지에서 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모두가 동시에 멈춰 서서 각자의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한 느낌, 지구인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제대로 각성한 느낌은 태어나서 지금껏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전까지 우린 그저 서로 다른 너와 나일뿐이지 않았을까. 네 문제와 내 문제가 언제나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 우리가 실로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농담처럼 들어 왔던 말, 나 또한 심심찮게 했던 말,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에는 모두 같은 처지가 되어봤으면 좋겠다는 극단적 바람이 섞여 있던 거였다. 그런 우리에게 어느 날 2020년이 배송되었다. 주소를 잘못 적은 것 같은데 다시 보니 우리가 주문한 게 맞았다.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때이다. 우주적으로 보자면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돌아서 있는 것뿐인데. 하지만 다시 뒤돌아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우리다. 앞으로 열두 절기가 지나 낮이 가장 긴 때가 찾아오면 그땐 지금보단 나은 세상이기를 바라본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방금 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가 왔다. 지금 시각 새벽 다섯 시. 동지가 지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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