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은 언제나 설명 없이 찾아왔다

by 글쓰는 체육쌤

몰입.
참 짜릿하면서도,
이상하게 아무 생각이 남지 않는 순간이다.


기억도 또렷하지 않고,
방금 내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겠는 상태.


이게 흔히 말하는
무아지경이고,
해탈이고,
득도의 순간일까.


초등학교 축구부 시절,
나는 딱히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중요한 대회가 있었고
내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경기가 어땠는지,
내가 뭘 했는지,
공을 몇 번이나 만졌는지도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전반전이 끝나자
감독님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우리 학교 에이스 두 명을
차례로 크게 혼냈다.
한 명은 혼자 드리블 돌파를 하라고,
한 명은 혼자 하지 말고 패스하라고.


다음은 나였다.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는데,

감독님은 뜻밖에도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제일 잘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3년 동안 축구부를 하며
처음 받아본 인정과 칭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뭘 잘했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두 번째 몰입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순간이다.


거실에서는 누나들이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눈은 화면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고,
TV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며,
누나들이 옆에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고,
머릿속에서는
다음 기지 위치, 병력 이동,
상대의 의도를
쉼 없이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다 적군이
기지로 밀고 들어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 *됐다.”


그제야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놀란 누나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게임에 몰입한 척했다.


요즘 러너들 사이에서는
‘러너스 하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힘든 줄도 모르고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상태.
고통보다 리듬이 앞서는 순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몰입은 늘
설명 없이 찾아왔다.


지금 이 글도 그렇다.


어떻게 써야 할지
계획하지 않았는데,
생각을 고르지 않았는데,
멈추지 않고
쭉 써 내려왔다.


몰입은
잘하려고 할 때보다,
애쓰지 않을 때
더 자주 찾아온다.


오늘도 나는
그 순간을 믿어보기로 한다.


오늘도 몸과 마음을 훈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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