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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Aug 08. 2021

16세의 소녀 성냥팔이가 예심 판사 앞에 섰을 때.

성난 민중에게 혁명의 성냥을 밝히다

 겨울은 무엇에 분노했는가. 세상의 잔혹한 부조리함에 분노했는가. 그러나 겨울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뱉는 혹한의 숨으로 가장 약한 이들을 죽이고 있었음을. 배부른 자들의 난롯가에선 낮이고 밤이고 값비싼 자작나무 장작이 타고 있는데 바로 그 밖에선 헐벗은 이가 누런 거품을 흘리며 생명을 잃고 있었다. 회벽돌로 발린 아늑한 세상 밖, 그 견고한 벽을 뚫지 못하고 픽 픽 쓰러지는 이들이 거리에 쌓여갔다. 늙어 넘어진 가로수가 이들보다 더 많은 눈길을 받았으리라. 아, 그들을 보며 알게 되는 것이다. 겨울은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참담함에 미어지는 가슴에서 흐른 한기가 길거리의 빈민을 얼렸으리라. 겨울은 그 모든 이들의 얼어버린 죽음을 품에 안고 비로소 더 이상 춥지 않게 해주었으리라. 겨울의 가슴에 안기는 것 외엔 그들은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던 것이다. 생과 사조차도 고를 수 없게 되어,  그저 말라비틀어지는 자신의 신체를 보며 선택의 주체에서 밀려나 자신마저도 자기 육체의 방관자가 되었으리라.


 차가운 거리 위의 소녀는 오늘 성냥을 한 개비도 팔지 못한 채 거리를 헤맨다. 소녀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 집은 그저 거리의 한기를 담는 독에 불과하며, 그 안에서 삭아가는 소녀의 아비는 노망과 굶주림으로 경련하며 소녀를 거리보다도 매섭게 냉대할 것이 분명하다. 소녀는 곱아든 발가락을 내려다본다. 살이 다 터져 시커먼 피딱지가 얹었다. 이제 고통스럽지도 않다. 걸음마다 허벅지에 붙은 나무토막을 바닥에 내리치는 것 같다. 아무 느낌이 없다. 소녀는 느낀다. 나는 이미 저 발끝부터 죽어가고 있음을.

 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의 푸줏간의 칼처럼 거칠고 둔탁한 날이 소녀의 몸을 벤다. 내장 깊은 곳까지 칼자국이 남는다. 소녀는 골목 사이로 몸을 피한다. 어떻게든 몸을 녹여보려, 살아보려 자신의 성냥 하나를 긋는다. 작은 불꽃이 소녀의 손 안에서 일어난다. 소녀의 몸을 녹이기에 턱없이 작은 불,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단 한 방울의 물을 먹인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 지금 나와 같겠구나. 소녀는 탄식한다. 골목의 창에서 웃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소녀는 창 안을 바라본다. 한 가족이 식탁에 뱅 둘러 앉아있다. 따뜻한 집 안에서 좋은 옷을 입고,  방금 갓 구워 김이 피어오르는 거위의 다리를 베어문다. 죽 뜯어지는 살결을 앞니로 잘라 게걸스럽게 입 안에 밀어넣는다. 그들은 웃는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여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이를 전부 드러내고 눈을 굽힌 채 깔깔 소리내어 웃는다. 소녀의 성냥이 바람에 꺼져가도, 미약한 온기마저 잃어가도, 그들은 웃는다. 하염없이, 마치 울 줄 모르는 사람처럼.

 성냥팔이 소녀는 두번째 성냥을 긋는다. 일렁이는 성냥불이 소녀의 눈 앞에 화려한 만찬을 보여준다. 거위 구이, 커다란 과일 파이, 주먹만한 초콜릿, 삼 층 짜리 크림 케이크. 소녀는 이것이 환영이라는 것도 잊고 그 속으로 손을 뻗는다. 잡힐 것 같은데, 입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음식들은 소녀의 손이 닿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다 탄 성냥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소녀는 세번째 성냥을 긋는다. 더 이상 소녀에겐 이것이 환영일 뿐이란 사실따위 중요하지 않다. 이대로 춥고 비참하게 사그라들 생이라면 즐거운 환영이라도 실컷 보기를. 차라리 내가 죽어 저 환영들 속에 낄 수 있다면. 소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성냥불을 바라본다. 그냥 죽여다오, 네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상 안에 나를 들이고 내 목숨을 받아가렴. 그런 소녀의 눈 앞에 죽은 할머니가 나타난다. 소녀는 직감한다. 나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구나. 소녀는 할머니 품으로 다가간다. 그런 소녀를 할머니는 밀쳐낸다. 죄 없는 내 손녀야, 어째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고, 아무데도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 죽음을 맞으려 하느냐. 무엇도 가져보지 못한 삶이 한스럽진 않으냐. 아가, 살아라. 이렇게 죽지 말아라. 설령 죽더라도 고요히 죽지 말고 소리지르고 몸부림치며 시끄럽게 죽어야 한다. 너를 살피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부르짖어라,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성냥 불은 꺼졌다. 소녀는 죽지 못했으며, 편안해지지 못했다. 그러나 소녀의 마음은 그 짧은 일생 중 가장 뜨겁게 끓었다.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웃음 소리가 새어나오는 골목의 집으로 다가갔다. 소녀가 문을 두드렸다.외면할 수 없는 분명한 노크 소리를 냈다. 안에서 콧수염이 난 중년 남자가 나왔다. 소녀는 그에게 성냥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성냥 사세요. 추위에 몸이 얼고 있어요. 제 위장은 거의 말라붙었어요. 이대로라면 저는 죽을 거예요, 잠시 안으로 들여주세요. 중년 남자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얘야, 나에겐 너같은 아이가 둘이다. 너는 거리에서 구르며 이런 구걸을 몇 번이나 했을테지. 나는 너와 나의 아이들을 같이 둘 수 없단다. 벼룩이나 이가 옮으면 어쩌려고, 그리고, 네 맨발이 집의 카펫을 더럽힐텐데 말이야.

 소녀가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현관 바닥에 뒹구는 남자를 본 후였다. 이 쥐방울만한 계집애가 감히! 거지 비렁뱅이 주제에 나를 공격해? 소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갓 꺼진 성냥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허벅지를 감싸안고 앓는 소리를 냈다.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지에 난 구멍 안으로 지져진 상처가 보였다. 성냥팔이 소녀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준 이 찰나의 고통은 내가 살며 느낀 전부요. 나는 당신이 밟는 카펫보다 무가치한 인간이란 말이오?


 소녀는 감옥에 갇혔다. 그 날 집 안 난롯가에서 나른한 잠을 청했을 이들은 소녀를 당장 죽이라 말했다. 그 날 거리 위에서 얼어가는 몸을 한껏 웅크렸을 이들은 소녀를 칭송했다. 소녀는 정녕 죄가 없었는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떠들었다. 소녀의 행동은 누군가에겐 분수도 모르고 저지른 위협이 되었고, 누군가에겐 우리 모두의 삶을 대변하여 최초로 외친 발악이 되었다. 소녀는 자신이 갇힌 독방 밖에서 거리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 받은 땅에 새 세계를 떨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인터내셔널가를 듣는 그 순간, 소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결박되어 법정에 끌려온 소녀에게 판사는 물었다. 왜 잘 살고있는 이를 공격했는가. 판사는 설명하기를 요구했다. 왜 사회를 혼란하게 할 불온한 행동을 하였는가. 대답으로 성냥팔이 소녀는 일어서더니 노래했다. 인터내셔널을. 판사가 고개를 내저었을 때, 소녀는 그에게 매섭게 외쳤다.


기립하시오!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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