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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Sep 02. 2021

누워버린 제너레이션

 에세이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처음 봤다. 한 두권 정도 베스트 셀러가 생기더니 아예 열풍이 되었다. 담쟁이덩굴처럼 서가를 뒤덮는다. 표지도 내용도 비슷하다. 따뜻한 파스텔 톤 배경에 예쁘고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진 겉표지 안엔 아주 녹을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은데 나는 눕고 싶고 더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으며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이런 내용들이다. 다 비슷해 보이는데 다 매출을 잘 올린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책 속 구절에 예쁜 색 밑줄을 긋고 예쁜 필터로 편집하여 SNS에 게재하면 반응도 좋다. 요즘의 에세이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이렇다. 이렇게 공감되는 이야기는 지금껏 없었다. 이것이다.


 자기계발서 열풍이 이미 우리를 한 차례 지나갔었다. 공부하다 죽어라, 열정을 불태워라, 너 자신을 일깨워라, 하버드 도서관의 낙서들, 서울대 학생들의 한 가지 공통점... 뭐 이런 것들이었다. 여전히 서가에 몇 권 남아있고 수요도 있다. 에세이 코너들의 파스텔 도서들에 비하면 완전 죽어버렸지만.

 그에 비하면 요즘 책들은 아예 다른 얘기를 해버린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라, 좀 쉬어라, 잘 먹고 잘 놀면 그게 행복이다, 너 싫은 건 굳이 안 해도 된다. 달콤하지만 나태한 언어들이다. 이 언어들에 대한 공감과 수요는 최고조에 달해 있다. 요즘 애들 왜 이러냐, 왜 이렇게 해이하고 나약하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계발서의 시대를 지나온 우리의 서가를 생각하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흐름인 것 같다. 사람을 미친듯이 채찍질하는데 서가에 조차 채찍이 도사리고 있다면 누가 서가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겠는가. 지금의 에세이들은 공감과 위로에 굶주린 배고픈 정서의 사람들을 달래는 수액이나 다름없다.


 에세이의 언어들은 직관적이다. 부드럽고 따스한 웅변대회 대사들 같다. 그럴듯한 말들이 쉽게 읽히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이 곳에서 위로를 얻는 건 좋지만 걱정도 든다. 이 시대의 문해력이 심히 걱정이 된다. 사실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는 찬란하고 빛나는 순간들, 생의 에피파니들은 전 세대, 현 세대의 문학들이 이미 목놓아 말하고 있다. 고전 명작 소설들, 시들, 현대 국내 국외 소설들에 에세이의 쉽고 진리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다. 차이점은 이것이다. 에세이는 금방 쉽게 읽어버릴 수 있다면 소설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곱씹고 음미해야 한다는 것. 에세이는 편하지만 소설은 불편하다. 공감하고 싶으면 먼저 사유해야 한다. 사유는 힘들다. 머리 아프다. 단순간에 이뤄지지도 않고 붙들고 있어야 조금의 실마리가 나온다. 그럼에도 소설가와 시인들이 문학의 방식으로 생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건, 사유의 끝에서 만나는 진한 감동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형식의 에세이 글과 소설이 같은 효과를 가진다면 굳이 왜 소설, 시를 읽겠는가. 소설과 시가 현대까지 쭉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매력 때문이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며 마침내 나만의 의미에 이르는 순간, 그 순간이 매력적인 것이다. 단어가, 구절이, 인물과 흐름이 내 안에서 조합되고 재탄생되며 어느 의미에 도달하는 순간 터지는 상쾌하고도 벅차는 감정이 소설과 시를, 문학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에세이들을 무조건 비판할 순 없다. 에세이 서가는 약국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젊고 바쁜 이들에겐 음미할 시간 따윈 없다는 것을 안다. 부서지기 직전의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좋은 곳이 파스텔 톤의 서가라는 것도 안다. 우리는 마치 진통제를 먹듯, 따스한 이야기들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 눈앞에 널려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 고통을 참기 힘들다면 사람은 당연히 진통제를 고르게 된다. 우리는 그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열정을 내세운 지독한 채찍질을 지나 포근하고 쉬운 진통제를 지나, 우리의 서가가 다채로운 만찬으로 가득차기를. 삶을 사는 건 지금 세대에게도, 전 세대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다음 세대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도, 르네상스의 예술가도, 현대의 사상가도, 우리 옆의 직장인과 학생들도 완벽한 평안과 행복엔 다다르지 못했기에. 다음 세대라고 해서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그래도 꾸준히 다양하게 읽자. 이야기 안에는 오직 그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자. 언젠간 조금이나마 이상적인 중용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살아 낸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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