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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Oct 28. 2021

가장 잔인한 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시인이 있었다. 황무지라는 이름에 맞추어 해석해 볼 수도 있고 시인의 마음이나 그 무렵의 시대상에 맞추어 해석해 볼 수도 있는 좋은 문장이다.


 문장 자체로만 놓고 보아도 누구에게나 잔인한 달은 존재하기에 이 문장은 몇백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다. 

 내게 가장 잔인한 달은 이 무렵이다. 구월 하순 부터 십일 월의 초입까지. 나는 시월에 태어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문도 모르게 가을은 나에게 가장 잔인한 계절이 되었다. 나쁜 기억들이 돌아오고 정신은 흔들리고 마음은 곧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진다. 가을을 잘 버텨내는 것이 나에겐 한 해의 가장 큰 숙제이다. 이 계절에 쓰러지면 어쩌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그리고 이 계절을 딛고 내년엔  더 성숙하게 도약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가을엔 땅 위의 것들이 시들지만 대신 차가운 땅 속에서 다른 것들이 견고해진다. 나의 경우에는 공포와 불안, 우울 같은 것들이 그 땅 속의 것들이다.


 과거를 털고 새로 일어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왔던 몇 가지 토대 위로 수많은 과거의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고 마시고 뛰며 자랐던 모든 시간이 과거가 되었으므로 나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내 몸에 새겨진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라며 같이 자란 것은 행동하는 방식, 태도, 생활 습관 뿐이 아니었다. 공포와 분노, 우울도 나와 같이 자랐다. 과거 어느 시점엔 분명 맥락과 실체가 있었을 부정적인 사건들은 시간이 흐르며 기억속에서 흐려졌다. 논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을 부분들은 다 날아가고 오로지 감정들만 남았다. 이젠 왜 생겼는지, 어째서 이렇게 오래 남은 건지 알 수 없는 묵은 감정들이다. 해를 거듭할 때마다 감정들은 몸집을 불렸다.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거인처럼 커져서 나를 따라다닌다. 내 뒤에는 나보다 더 큰 감정들이 있다. 

 그 감정들이 가을마다 나를 잡아먹기 위해 잠에서 깨어난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케케묵은 감정들이지만 눈물은 늘 새것을 써야 한다. 아주 큰 낭비이다. 지나간 것 때문에 괴로워 하느라 방금 들이쉰 숨, 아까 마신 물, 아침에 먹은 밥 따위를 사용해서 울어야 한다. 한참 헐떡대고 울다 보면, 우느라고 하지 못했던 일과들을 처리해야 한다. 우느라고 고파진 배를 채워야 하고, 우느라고 말라버린 목을 축여야 한다. 

 너무 비효율적인 과정이라서, 우는 것이 죄스러워 아예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다 보니 우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적도 있다. 대신에 다른 것으로 값을 치렀다. 우는 대신 내가 앞장서서 나를 괴롭힌다든가, 쉽게 낫지 않을 상처를 줘 버린다던가. 결국 더 큰 비효율을 저질렀고, 그 대가를 되돌려 받았다.

 그 후 우는 것이 얼마나 깨끗하고 효율적인 과정인지 깨닫게 됐다.


 가을에 난 좀 더 씩씩해야 한다. 울기 위해 더 많은 밥을 먹어야 하고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한다. 뻔뻔하게 드러누워 쉬기도 해야 한다. 봄 여름 겨울엔 가을 분의 숙제를 해 둬야 한다. 가을에 좀 더 편히 쉬려면 다른 계절엔 부지런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가을의 나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하기 때문에 별 수 없다. 나를 부지하기 위해 고안한 최선의 방법이다.


 내일 아침에 나는 다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력을 다해 싸워도 물리칠 수 없는 감정들은 언제고 나를 죽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한 공기를 꽉 채운 밥에 낙지젓을 듬뿍 올려서 꼭꼭 씹어 먹을 것이다. 밥을 먹고 나면 빵도 먹고 과자도 먹고 과일도 먹고 그럴 것이다. 동네 공원을 돌며 산책을 할 것이고 시간이 나면 자전거를 타고 하천 주위를 달릴 것이다. 잠도 충분히 아주 깊이 자야겠다. 잘 먹고 잘 자서 얼굴에 윤이 나게 만들 거다. 묵은 감정들과 싸우느라 쓰는 새 눈물들은 모두 새 자원에서 끌어올 것이다. 나를 축내지 않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시월에도, 가장 잔인한 달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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