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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Dec 13. 2021

문학의 소생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에 더 애착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순간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시기가, 시대가, 풍조가 되기도 한다. 살아있는 것을 사랑할 수 없어 죽은 것을 사랑하는 세상은 과연 좋은 세상인가.


 문학이 지금의 시대에 이토록 호황인지 호황이 아닐지 모를 관심을 받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살아있는 것에 애착을 느낄 수 없는 시대. 지금의 시대는 그런 시대이다.

 문학이 죽은 지는 꽤 되었다. 문청들이 사라지고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글거리는 이야기라 치부되며 어떠한 감성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이다. 감성적인 것들이 살아 숨쉬기 힘들었던 나날들. 치열한 것들만이 치열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시대의 이야기. 우리가 모두 진절머리를 느껴 벗어나고자 분투했던 시대의 이야기. 문학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우리는 관의 문을 열고 있다. 쏟아져 나오는 서가의 비슷한 이야기들이 문학을 다시 살리려는 움직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인들은 굶고 문청들은 빈곤하다.


 죽은 것에 애착이 느껴지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실시간으로 그 추악함이 드러난다.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것이 남기는 자취엔 나쁜 숨결 또한 포함되어 있다.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지점들과 비난들을 만들며 다른 추악함을 빚어낼 수 있는 지점들이다. 죽은 것은 이미 새로 무언가를 만들 수 없기에 미화되는 것밖엔 남은 것이 없다. 아무리 추악한 것이었다 해도, 추악한 지점을 거쳤다고 해도. 기억 속에서 회자되다 보면 아름다웠던 것만 남기 마련이다. 어쩌면 문학도 그런 것이다. 그 시대의 첨예한 싸움들마저 낭만으로 포장되는. 그 시대의 아름다웠던 문장들이 하나의 신화처럼 신성시되는. 문학은 신성화의 지점에 서 있다. 쉴새없이 늘어가는 신도들에게 추앙받으며 그야말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믿는 자가 구원 받나니, 모든 것을 할 수 있나니. 그러한 교리가 생성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종교가 아닌 하나의 학문이며 예술이다. 잠시 죽어 있더라도 언제든 살아날 수 있으며 설령 살아나더라도 신이 될 순 없는 것이다. 문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가 신화 뿐이던 시대는 지났다. 너무 먼 고대의 이야기이다. 문학을 전개하고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들. 각기 다른 서사를 가진 인간들 뿐이다. 구원을 구하기에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글 자체가 구원이 될 수는 없다.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고 인간이 고뇌하는 지점을 포함하는 것이 문학이다. 절대적인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빈곤한 이들을 구원하는 세계는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그 밖의 외롭고 비참한 것, 첨예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 어려운 것을 포함하기에 그 가치를 가진다.


 문학이 살아나고 있는 것인지, 사적이어야 할 싸움이 사회를 아우르는 풍조가 되어버린 요즈음을 탈피하려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학은 마치 거름망처럼 사용되고 있다. 각자의 부정적인 감정을 거르고 느긋하고 달콤한 것만 남기는 것이다. 문학이 그래서야 될까. 슬프고 비참하고 괴롭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면. 세상의 슬프고 추악한 면을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면. 문청과 문학인은 여전히 세상의 가장 작고 빈곤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청과 문학인들은 빈곤하다.

 어쩌면 이것이 근본적인 원리일까. 예로부터 문인들이 빈곤했던 이유는 빈곤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빈곤함은 피곤하다. 주목하지 않으면 편하다.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끝없이 불쾌하다. 그 불쾌감이 문학을 이끈다. 물론 아름다운 사랑과 서정 추억도 문학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이 지탱되던 시대는 과거의 이야기.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이야기다. 서정시와 노래들만으로도 세상이 풍족했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요즈음은 그럴 수 없다. 빈곤한 이야기가 사회의 추악한 곳을 메우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다면. 

 문학이 없는 사회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쏟아져 나오는 달콤한 이야기들 사이 한 권 끼어있는 빈곤한 이야기들을 더 사랑할 수 없을까. 문청들 빼고, 문인들 빼고, 저마다의 다른 서사와 관심사와 직업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들이 빈곤한 이야기를 사랑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아마 그 때 문학은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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