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미정 Sep 27. 2023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소확행의 재발견

휘게 라이프


코펜하겐. 어린 시절 부루마블 게임 할 때나 들어봤던 도시에 오게 될 줄이야.

폴란드에 사는 동안 언니와 3개월에 한 번은 꼭 보기로 했는데, 이번엔 서로 여의치 않아서 언니가 덴마크 일정이 있을 때 내가 주말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남편의 독박육아 협찬으로 1박 2일 자유여행. 늘 산더미 같은 짐과 아이들을 이고 끙끙대며 여행을 하다가, 혈혈단신 처음으로 핸드백 하나 들고 비행기를 탔다. 여행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나! 그렇게 난 사뿐히 북유럽 땅을 처음 밟게 되었다.


언니는 입국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덴마크 국기를 흔들며 나를 환영해 주었다. 입국장에 누가 나를 기다려준 것이 얼마만인지. 나는 신이 나서 한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한 발씩 깽깽이로 리듬을 타며 화답했다. 호들갑을 떨면서 언니에게 달려가자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뜨겁게 느껴졌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지금 신나는데. 늘 얌전한 나이지만 언니를 만나면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호들갑을 떨게 된다. 언니가 나의 방정맞은 모습을 보며 깔깔 웃는 걸 보면 신이 나서 더 까불게 된다. 우리는 덴마크 국기를 들고 신나게 셀카를 찍었다. 북유럽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다.


형부와 어린 조카와 넷이 외출. 전철을 타고 코펜하겐 중심지에 함께 나갔다.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시청, 왕궁, 광장, 안데르센 동상, 유원지, 운하를 둘러싼 알록달록한 건물과 레스토랑 등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코펜하겐의 중심지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많이 다니다 보면 이제 건물들이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니 건축의 디테일이 달랐다. 좀 더 고급스럽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격이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대부분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여전히 고고한 자태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상점에서 보이는 물건들도 무척 귀티가 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기념품 숍에 파는 작은 소품들도, 장인이 수제로 만들어놓은 느낌, 유명 디자이너들이 깐깐하게 제작하고 선별한 물건들만이 진열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다른 나라들에서 봤던 것과 다른 색감, 다른 디자인, 다른 진열이었다. 역시 디자인의 강국 덴마크인가.


늬하운 운하와 귀여운 디자인 상품들


형부는 나를 'Illums Bolighus'라는 곳에 데리고 들어갔다. 일룸스 볼리거스는 덴마크의 가구제조업체이며 지금은 덴마크 뿐 아니라 북유럽의 유명한 디자인 브랜드를 취급하는 백화점과 같은 매장이다. 그러나 매장이 아니라 디자인과 인테리어의 수석들을 모아놓은 디자인 전시회 같았다. 가구, 조명, 소품, 옷 등이 층별로 나뉘어 진열되어 있었다.


디자인과 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덴마크인 형부는 덴마크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폴 헤닝센(PH)이 디자인한 램프를 보여주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전등갓을 사용해 은은하게 빛을 분산시키는 디자인이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조명과 의자 등 덴마크에서 오래 사랑받는 가구의 특징들을 알려주었다. 사실 난 모던하고 심플한 인테리어는 왠지 차갑게 느껴져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앤틱 스타일을 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세련된 덴마크의 디자인들이 이전과 달리 조금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디자이너인 우리 언니도 덴마크 스타일을 무척 좋아하는데, 언니는 덴마크의 남다른 감각과 디자인이 길고 어두운 겨울에서 오는 것 같다고 했다. 덴마크는 겨울이 정말 길다. 겨울에는 낮이 무척 짧고 하루 중 17시간은 어둠이다. 혹독한 추위와 어둠 속에 지내면서 이들은 자기들만의 삶의 낙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오래 머물러야 하는 집안에서 이들은 따뜻한 조명을 밝히고, 기분 좋은 인테리어로 집안을 아늑하게 꾸몄을 것이다. 그러면서 디자인과 인테리어가 발전한 것 같다고 언니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일룸스 볼리거스의 가구들


거리를 걷다 보니 HYGGE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카페에도, 에코백과 머그컵 같은 기념품에도 많이 새겨져 있었다. 언니가 휘게는 덴마크 사람들이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이나 철학 같은 거라며 알려주었다. "휘게를 직역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없긴 한데, relaxaion, cozyness.. 또 뭐가 있을까?"라고 형부에게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We say it is 'the art of doing nothing'" 

어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미학'이라니! 정말 멋지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미 나는 휘게 스피릿이 좋았다.


짧았던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곧 스위스에서 만나자며 작별인사를 했다. 공항에 일찍 도착해 서점에 들렀다. 다행히 영문서적 코너에 책이 많이 있었고, 그중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 있는 책은 바로 <HYGGE>라는 제목이었다. 딱 덴마크다운 디자인과 색감의 예쁜 책. 안에는 심플한 일러스트와 사진들이 함께 실려있었다.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답게 이 작은 책 한 권이 거의 4만 원에 육박했지만 이건 사야만 했다.


책도 너무 예쁘고 궁금해서,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바로 책을 펼쳤다. 아직 영문서적이 그렇게 술술 읽히는 수준이 아닌데도 정말 재미있게 읽혔다. 심플한 디자인만큼이나 문장도 주제도 심플해서, 조금 느린 속도지만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읽어나갔고, 비행기에 있던 세 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휘게 라이프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앍게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재미있게 읽은 영어책은 처음인 듯:)


이 책은 휘게란 무엇이며 휘게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다정하게 알려주었다. 짧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휘게는 행복에 관한 것이다. 기분 좋고 편안한 상태를 뜻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소박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덴마크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 노르웨이어로 '웰빙' 혹은 'hug'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휘게의 중요한 요소로 다음의 것들을 소개한다.


1. 초를 켜고 따뜻한 조명을 켠다. 아늑한 분위기는 휘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No candle, No Hygge라고 할 정도.


2. 핫초코, 커피, 케이크, 쿠키와 같은 달콤함. 휘게스러운 것은 지나치게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보다 기쁨을 주는 달콤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살 수 없지만, 케이크는 살 수 있잖아!'라면서.


3. 휘게는 혼자 보다는 어울림이다. 가족이나 친구들 몇몇이 모여, 누구도 혼자 주목을 받거나 대화의 중심을 차지하려 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화하며,  다 같이 함께 도와 음식을 준비하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휘게스럽다.


4. 휘게의 70%는 '집'에서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과의 만남 장소로 레스토랑이나 카페보다 집을 선호한다. 집이 게의 중심이기 때문에 집을 아늑하게 꾸미는 인테리어에 진심이다. 집을 더 휘게스럽게 만들어주는 열 가지 요소로 작은 힐링공간, 벽난로, 초,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 식물 등의 자연, 책, 도자기, 부드러운 촉감, 빈티지, 담요와 쿠션을 꼽는다.


5. 옷차림은 '캐주얼'이 키포인트. 블랙 컬러를 선호하며, 4계절 내내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할 수 있는 커다란 스카프와 레이어드 패션이 필수다.


6.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기. 자연 속에 머물며, 별을 보며, 군밤을 까며, 수프를 만들며, 장작불을 떼며, 책을 읽으며, 스마트폰과 노트북은 잠시 꺼두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감사하기. 현존과 감사는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


휘게에 대한 다정한 이야기가 담긴 예쁜 책


길고 어두운 겨울 동안 벽난로 옆에서 핫초코를 마시고, 사람들을 초대해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빵을 굽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혹독한 겨울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자신들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그들만의 축제를 누렸을 것이다. 잠시 여름에 해가 길고 시원한 것을 빼면 그렇게 살기 평화로운 조건은 아님에도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1위로 꼽힌다. 어떻게든 행복하려고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는 이들의 행복에 대한 열정 덕분일 것이다.


덴마크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큰 희망이 생겼다. 사실 폴란드에서 남편 회사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는 게 너무 아쉽게 느껴졌다. 아직 1년 반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슬퍼지려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날씨였다. 여름의 무더위와 미세먼지 때문에 가능한 한 더 폴란드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폴란드에 오니 미세먼지가 없고 늘 파란 하늘이어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기에 좋았고, 여름은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 쓰는 날이 손에 꼽힐 만큼 시원하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에 장마에 폭염에.. 한국에 돌아가면 또 얼마나 삶의 질이 떨어질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덴마크인들의 휘게 라이프가 내 생각을 180도 바꾸었다.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 하루 17시간의 어둠 속에서도 이렇게 행복을 찾아내 삶을 즐길 수 있다면, 더운 여름인들 못 찾아낼 이유가 없잖아! 하물며 춥고 어두운 겨울보다, 밝고 더운 여름에 찾아내는 게 더 쉽지 않겠어? 어디서나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한국인데! (유럽은 에어컨 없는 집이나 시설이 많다) 추운 겨울에 이들이 벽난로에서 핫초코를 마시고, 집안을 아늑하게 꾸미고 친구들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면, 나도 무더운 여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면 될 것이다.


외출이 어려운 폭염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며 하루종일 책 읽기, 아이들과 함께 과일화채나 탕후루 만들기, 동네 수영장 회원권 끊기, 팝콘 먹으며 영화 보기, 테라스에 초미니 수영장 만들기, 좋아하는 전시회 가기 등, 행복을 찾겠다는 열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씩 하면서 소확행의 즐거움을 알면, 이것들을 할 수 있는 여름이 기다려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 일이 습관이 된다면,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선택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언니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이 나라 사람들은 행복에 진심이야. 행복을 열심히 공부하는 나라라니까"     


전 세계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수년 전에 휘게 열풍이 불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야, 덴마크까지 직접 날아가서야, 휘게를 만나게 되었다. 모든 타이밍에는 이유가 있을 터. 어렵게 얻은 만큼 내 인생에 더 깊이 새겨지지 않을까.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명랑한 의지가 생긴 것 같다. HYGGE!

이전 14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유모차를 밀며 마이웨이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