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다 같이 체코로 여행 가는 날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서쪽 국경을 넘으면 바로 체코다. 프라하까지 세 시간 반, 거기서 두 시간 정도 더 가면 '체스키 크룸로프'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 중세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여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다. 점심 무렵 도착해 동화처럼 예쁜 마을을 둘러보고, 성 탑에 올라가서 중세유럽 마을과 같은 전망을 한눈에 바라보기도 했다. S자의 모양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강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아기자기한 마을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저곳 둘러보았더니 아이들과 남편은 체력이 방전되었다. 6시 무렵 숙소로 들어갔고, 늦은 점심을 먹었던 터라 저녁도 늦게 먹기로 했다. 남편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노트북에 옮겨 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탭으로 영상을 보며 쉬고 싶어 했다.
"나 좀 뛰고 올게!"
이날은 '30일 5분 달리기'를 시작한 지 6일째였다. 여행 오면서 처음으로 러닝화와 운동복을 챙겨 왔다. 단 5분이어도 쉬지 않고 뛰면 땀이 났기 때문에 이제 제 통기성이 좋은 운동복을 꼭 입고 뛰어야 쾌적하게 잘 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자를 하나 눌러쓰고 운동화를 갈아 신고 밖으로 나섰다. 아까 둘러봤던 강가의 성 근처까지 가서, 이번에는 반대쪽 강변으로 달렸다. 아까 잔잔한 물살의 강과 달리 빠르게 내려 흐르는 강한 물살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강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였다. 가까이서 봤던 성을 강을 끼고 멀리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절경이어서 뛰다 말고 멈추어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러면 운동이 별로 안될 수도 있고, 내가 스스로 정한 최소 5분 연속 달리기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버리기로 했다. 이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달리기, 그저 즐기자. 예뻐서 멈추면 좀 어떤가. 가다 서다 하면 좀 어떤가. 여기는 아름다운 여행지이고, 나는 이곳에서 풍경을 만끽하며 달려가고 있는 걸.
달리기의 행복을 알게 해 준 풍경들
조금 더 뛰다 보니 공원이 나왔다. 굽이굽이 굽은 강가를 끼고 있는 푸른 잔디의 공원. 좌 강, 우 공원을 가로지르며, 그 풍경을 충분히 바라보며 천천히 달렸다. 행복했다. 그냥 걸으며 즐겼던 여행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또 낯선 공기를 가르며 나의 두 발로 달려 나가는 느낌. 그 순간이 너무 감격적이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나는 아마 이 경험으로 평생 러너가 될 것 같아.'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작정한 6일째에 벌써 달리기의 매력을 깊이 알아버렸다.
여행지에서 달리는 것의 짜릿한 매력도 알게 되었지만, 큰 장점도 두 가지 발견했다. 첫 번째는 같은 시간 안에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분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는 것과 20분 뛰며 볼 수 있는 것은 크게 다르다. 나는 이날 22분을 달렸는데, 아이들과 함께 몇 시간 다녔던 길보다 훨씬 더 멀리 가서, S자로 굽어진 강변을 거의 다 둘러보고 올 수 있었다. 뭐든 궁금하고 보고 싶은 여행지에서는, 나의 두 발로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큰 장점이다.
두 번째 장점은, 달리면 금세 더워지기 때문에 쌀쌀하거나 추운 날씨에도 겁 없이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아무리 여행지가 좋아도 쌀쌀하면 오래 걷기가 힘들어서 숙소에 빨리 들어가게 된다. 내가 숙소에서 다시 나왔을 때도 해가 기울어 공기가 꽤 차가워져 있었다. 옷을 너무 얇게 입고 나왔나 싶었지만 일단 달렸다. 조금 달리니 더워지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냥 걸었으면 감기가 두려워 금세 돌아갔을 텐데, 몸이 달궈지니 추위는 금세 사라지고 어디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는 어마무시한 장점이다.
돌아가는 길, 높은 곳에 올라 노을 지는 이 마을의 풍경을 한눈에 보기 위해 언덕길을 달렸다. 지금까지 무리 없이 늘 '5분만'을 외치며 집 주변 평지를 돌았는데, 6일 차에 벌써 도전하게 되는 언덕길이었다. 헉헉 거리며 높은 언덕에 올랐다. 마을 사이사이로 올라갈 때는 돌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더 어려웠다. 초보러너에게는 난코스. 하지만 뷰 포인트에 도착해서 강과 마을과 성과 해 지는 풍경을 함께 바라봤을 때는 다리의 통증은 잊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다리 근육이 무척이나 아팠다). 하지만 조금 일찍 도착한 탓인지 아직 빨간 노을은 아니었다. 불타는 노을을 보고싶어 10여분 기다렸는데 땀이 식어서 몸이 싸늘해졌다. 어차피 구름이 좀 끼어있어서 해 떨어지는 것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고, 더 버티다가는 감기에라도 걸릴까 싶어 그만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새 몸이 차가워져서 따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무척 개운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맛있는 햄버거 집으로 향했다. 맛집의 버거와 체코 맥주 한 모금은 정말 꿀맛이었다.
S자로 굽이치는 강을 따라 저녁 달리기
체코 여행지에서 맞이한 이튿날, 오늘은 아침 일찍 달리기로 했다. 여행일정을 마치면 5~6시간을 운전해서 집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캄캄한 밤에 도착하면 달리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물론 이 예쁜 곳에서 아침 달리기를 꼭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여행에 와서 아침에 달리기를 하다니. 이건 아마도 내 평생 처음일 것이다. 나는 아침에 잠이 많고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라, 여행지에 가면 가족 중에 가장 늦게 일어나고, 호텔 조식이 끝나기 직전에야 가서 밥을 먹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그것도 여행지에서 달릴 생각을 하다니! 일생일대의 큰 변화다.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제 2만 보 이상을 걷고 달리며 피곤해서였는지 푹 잤고, 아침에 뛸 생각에 기대하며 잠든 나의 마음이 내 눈을 뜨게 한 것 같다. 남편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아이들도 웬일인지 일찍 잠에서 깼다.
"나 10분만 달리고 올게!"
아직 조식 시작 시간까지 꽤 남아있어서 잠시 달리고 오기로 했다. 따뜻한 재킷도 입고 나갔다. 역시나 쌀쌀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오후 북적대던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안개를 가르는 느낌이 좋았다. '모두 침대에 있을 때, 여행지에서 나른하게 게으름을 피울 때, 나는 달린다고!'라는 혼자만의 뿌듯함도 느껴졌다. 오늘은 공원 쪽으로 강가를 건너가서, 어제 가보지 못한 강변 뒤쪽으로 더 가보았다. 쾌청한 날씨였던 어제도 예뻤지만 안개 자욱한 아침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골목 사이사이, 아직 열지 않은 아이스크림 집, 옷가게, 피자 가게, 카페, 책방, 기념품 숍 등을 살펴보며 돌아왔다. 러너의 복장으로 나와 같이 달리고 있는 여자를 발견해 반가웠다. 쌀쌀하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달리다 보니 또 땀이 났다. 숙소로 돌아가 귀요미 둘째와 함께 아침 샤워를 하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호텔에서 날 위해 내어 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 땀이 나게 운동을 해서인지 밤에 일찍 잠들게 되었고, 식욕이 부쩍 좋아진 느낌이다.
아침 달리기의 풍경. 강물로 떨어지는 슬라이드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신이 났다:)
30일 동안 매일 달려보기로 작정한 지 6일째에 이런 동화 같은 여행지에 온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행지에서 달리기를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여행지에 가면 달리기를 하고 나야 그 도시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느낌이야"라고 말했던 친언니의 말도 생각났다. 감히 달린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왕초보 러너이지만, 뭔가 조금 알 것 같다. 달리기의 매력. 달리기의 마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