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 부다페스트에 입성했고, 야경으로 유명한 부다페스트였다. 그러나 나는 아이 둘과 함께였다. 첫날 저녁부터 밖에 나가기 싫다며 숙소에 있겠다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혹시 몰라 챙겨 온 한국 라면을 끓였다. 둘째 날은 아이들을 위해 먼저 세체니 온천을 찾았다. 드넓은 야외 온천. 중세시대부터 이곳에서 이런 멋진 곳에서 온천 문화를 즐겼다니 놀라웠다. 물이 따뜻해서 오랫동안 잘 놀았다. 나는 혼자 씻고 옷 갈아입고 머리 말리고 해도 엄청 오래 걸리는 사람인데, 추가로 두 여자를 씻기고 입히고 말려줘야 하니 시원하게 온천을 마치고 다시 땀을 흠뻑 쏟았다. 그래 개운하게 잘 놀았으면 됐다. 돌아가는 길 택시에서 피곤한 아이들은 잠들어버렸다. 오늘 저녁도 나가기는 글렀군.
부다페스트 세체니 온천
겨우 깨워서 숙소로 업고 왔는데 잠이 덜 깨서 짜증이 심했다. 또 라면을 끓여달라는 아이들을 위해 국수를 끓여주었다. 혹시 몰라 가져온 코인육수가 열일했다. 벌써 오늘 이틀째 밤인데, 맛집 한 번 못 가고, 부다페스트 시내도 야경도, 강 구경도 한 번도 못하고 이렇게 이튿날을 보내다니.. 조금만 걸어가면 강가의 그 유명한 경치가 펼쳐질 텐데! 무척이나 답답했다. 여행자의 글을 보고, 여행 프로그램과 여행 책자를 보고 부다페스트의 풍경에 반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차로 7시간 반을 달려 찾아온 곳이었다. 그런데 이튿날까지 숙소에서 이러고 있자니 얼마나 애가 타던지.
국수로는 밥이 모자랄 것 같아 숙소 근처에서 먹을 것을 좀 사가지고 오는 길에 보게 되었다. 대. 여. 자. 전. 거! 갑자기 심장이 콩닥 설렌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빨리 가야 하니 일단 자전거에 적혀있는 이름과 바코트를 사진으로 찍어 얼른 들어갔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운 후에 거실로 살며시 나왔다. 아까 찍어둔 대여자전거를 찾아보았다. 앱을 다운받고, 신용카드 등록도 완료. 내일은 한 번 도전해 볼까?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지인에게 빌려온 여행책자를 살펴보고 구글 지도를 찾아보았다. 자전거를 타면 그 유명한 세체니 다리를 건너는데 10분이면 충분했다.
부다페스트의 대여자전거
셋째 날, 오늘은 일기예보상 날씨가 좀 흐리거나 소나기가 오는 걸로 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실내 위주로 다녔다.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가 실제로 살며 제자도 양성했던 리스트 박물관에 갔다가, 우리나라의 전쟁기념관과 같은 테러하우스에 방문했다가, 옛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살롱과 같았다는 뉴욕카페에 갔다. 이미 다 컸지만 잘 걷지 않으려는 일곱 살, 다섯 살의 두 딸들을 태운 쌍둥이 유모차를 힘겹게 밀며 일정을 마치니 오후 5시 무렵이 되었다. 숙소에 돌아와 한숨 돌리고, 아이들은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자기들만의 자유시간을 누렸다. 그리고 아이들은 역시나 밥 먹으러 나가기 싫다고 했다. 나는 저녁거리를 살 겸 나갈 준비를 하다가 문득, '그래, 자전거! 오늘 도전해 보자!' 어제저녁 먹을 것을 사러 잠시 나갔을 때나, 아침에 슈퍼마켓에 다녀왔을 때도 잘 있어주던 아이들이었다. 마침 여분으로 가져온 핸드폰 공기계로 CCTV연결이 돼서 아이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거나 통화를 할 수도 있었다.
리스트 박물관과 뉴욕카페
아이들에게 저녁을 사 올 테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핸드폰 카메라에 손을 흔들라고 이야기해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 작은 공원에 줄지어 서있는 자전거를 한 대 빌렸다. 미리 준비해 둔 덕에 QR코드를 스캔하자마나 잠겨있던 자전거가 찰칵 열렸다. 앞의 바구니에 가방을 놓고 핸드폰을 꽂아둔 셀카봉을 가방 지퍼사이에 넣어 내비게이션으로 볼 수 있게 고정시켰다. 목적지는 세체니 다리 건너편. 지도를 따라가며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자전거는 낯설지 않았지만 길이 낯설어 긴장되었다. 자동차 도로의 우측 끝이 자전거도로로 표시되어 있는데, 어느 곳에는 표시가 없었고, 차와 함께 도로를 달리다가 우회전이 아닌 좌회전을 해야 할 때는 무척 난감했다. 복잡한 큰 도로에서는 겁이 나서 인도로 올라가기도 했는데 주변을 살피니 인도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차도와 인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계속 긴장했다. 그렇게 조금 가다 보니 드디어 다리가 보인다. 회전교차로를 지나 바로 세체니 다리에 진입. 이곳부터는 차량이 금지다. 원래 그런 것인지 공사로 통제하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차, 구급차와 같은 차량 외에는 진입할 수 없다고 되어있었고 도보로 건너는 것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무척 한적했다. 지금 이것은 완전 자전거 전용도로!?
페달을 힘껏 밟아 청록빛의 세체니 다리에 올라타는 순간 강가의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쳤다. 드넓은 강이 펼쳐졌고, 파스텔 빛의 저녁 하늘, 그리고 부다성과 국회의사당 등, 오랫동안 갈망했던 그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세체니 다리에서 두 발로 자전거를 힘껏 밟으며 그 광대한 풍경을 끌어안는 느낌... 감격이었다. 순간, 7년 전 자전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건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벅찬 마음이 생생하게 교차되었다.
자전거 타고 건너온 세체니 다리
그런 순간이 있다. 어떤 경험은 너무 짜릿하고 감격스러워서 이 경험 전의 나와 후의 내가 전혀 달라지는 느낌. 그러니까, 어느 한 경험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그런 것 말이다. 그날 나의 자전거가 그랬다. 며칠 동안 아이들과 함께 국경을 넘고, 여행을 짜고, 낯선 길을 헤매고, 아이들을 먹이고, 아이들에게 메이고 허둥대며 내내 긴장했던 내가, 그 다리 위에서 그 바람과, 나의 역동적인 다리의 움직임과, 그 놀라운 풍광 속에서 잠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다리를 건너 기분 좋게 자전거를 세웠다. 근처 어부의 요새에서 강 너머로 보이는 절경을 감상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영상을 보며 잘 놀고 있었고, "엄마 금방 갈게!"라고 흥분해서 소리쳐도 별로 개의치 않고 패드 속 영상에 몰입했다. 평소는 패드를 쉽게 내어주지 않으니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금쪽같은 시간이었을까. 나 역시 금쪽같은 시간을 보내고,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맛있는 음식과 팬케이크를 사갔으나 시큰둥한 아이들. 아이들에겐 라면이 최고다.
어부의 요새에서 본 풍경
예보와 달리 비가 오지 않아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아이들과 보트를 타러 나왔다. 강에서 야경투어를 하는 보트다. 숙소의 호스트가 제안해 준 투어버스 티켓에 야경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40유로였는데 우리 아이들 나이는 무료여서 가성비 최고의 투어였다. 보트 선착장까지 1.7km. 대중교통을 타도 도보 거리가 큰 차이 없어서 그냥 걸어갔다. 역시나 두 아이를 유모차에 모시고 힘껏 밀고 갔다. 하지만 조금 전의 세체니 다리 위에서 느낀 짜릿함 때문인지 에너지가 솟았다.
캄캄해진 밤 9시에 보트가 출발했다. 보트의 조명까지 모두 끄자 반짝이는 주변 풍경이 더욱 또렷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 5분 정도를 달리니 그 화려하고 웅장한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이 눈에 펼쳐졌다. 주황빛의 조명이 켜지니 낮보다도 훨씬 더 화려해 보였고, 그 화려한 빛이 흐르는 강물에 비쳐 더욱 멋졌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성이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아직 어려서 풍경에는 크게 감명받지 못하는 두 딸들도 이 광경만큼은 정말 예쁘다며 좋아했다. 자기들도 사진을 찍겠다고 내 핸드폰과 카메라를 가져가 셔터를 눌러댔다.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의 로망이었던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자전거 타고 세체니 다리를 건너고, 예쁜 두 아이와 금빛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구경하다니.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바로 옆에 두고 이틀 동안 갇혀있었으니 답답했을 만도 하지. 사실 부다페스트 여행 전에 고민을 많이 했다. 이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혼자 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었다. 오길 잘했다. 자전거 타길 잘했다. 아이들과 보트 타길 잘했다. 뭐든 부딪히며 해보는 건 잘하는 것이다. 오늘의 자전거 타기는 아마도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기억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