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와 남자.
서빙고동에는 내 친구의 작업실도 있고 , 어떤 남자도 있다.
어떤 남자는 친구의 작업실 옆집에 조그마한 화실을 차리고 사는 남자다.
그 남자를 처음 본 날 내가 알게 된 것들은 올 해로 마흔여섯을 맞고 서빙고동의 후미진 골목 안, 여름이면 비가 새고 겨울이면 수도가 어는 20만 원짜리 월세 방에서 10년을 보냈다는 것. 그는 오로지 옥션에서만 쇼핑을 하는 사람, 학생과 어른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사람, 코로나 이전에는 거리의 벽화를 채웠던 사람, 자정이 넘은 시각이면 더 크로스 등의 락발라드를 정성스럽게 열창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는 나와 내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놓아주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는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그랬다.
남자와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의 주위로 외로움의 기운이 음산하게 스친다며. 그 기운이 자신들 에게도 닿는다며 모두가 질색했다. 내가 알고 겪은 것은 그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 했다. 무언갈 아는 듯 단정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랐고 그 에게도 역사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6년을 끊었던 담배도 자의로 행 하며 사람들과 섞여 들려는 그 사람이 정말 외로운 사람인지 , 외로움을 자처한 사람인지 , 지금 이대로도 만족하며 사는 것 인지 알아야 했다.
나는 그를 싫어했으면서도 좋아했다. 그건 지금도 같은 감정이다. 좋아하지만 싫었고 싫지만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은 지나친 연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솔직한 얘기를 하자면 나는 그를 처음 봤을 때 내 심연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가 내뿜는 외로움은 우리 모두의 외로움 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가진 외로움 일 것이라. 다만 다들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하는.
하루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골목 어귀에서 마주친 그의 구부정한 실루엣을 , 그 검은 형체를 목격했을 때이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응시하며 멈춰있었다. 사람의 온기를 찾는 듯. 그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적목처럼 번뜩이던 두 눈은 흡사 들짐승의 번뜩이는 눈과 닮아서 나는 그 남자가 사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었다.(거미여인의 키스를 한창 읽던 때) 그래, 나는 이때만 해도 그를 두려워했었다.
마침내 그동안 바라왔던 일을 감행하는 날. 감히 그 남자의 과거를 듣겠노라 마음먹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됐는데 처음 들어가 보는 그의 화실 안에는 아그리파 비롯한 석고상들보다 그가 보살피는 길고양이가 더 많았다. 그는 만화가가 꿈이었다고 말했다. 요즘 말로는 웹툰 작가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의 이십 대 시절의 작화를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으레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면 품고 있을 과거의 사랑과 아픔, 커다란 꿈이 있던 시절 , 그리고 과거를 겪어낸 현재가 그에게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 중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줬던 것은 단연 벽화 이야기였는데, 그 남자에게 벽화라는 것은 세상의 관심이었고 인정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만화를 그려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와 그림을 그리니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삶의 의미를 되찾아 갔다는 것. 나는 그에게 있어 벽에 그림을 그려내는 행위가 곧 이때껏 살아내는 원동력이었으리라 이해하고 온몸으로 존중하려는 듯 고개를 무던히도 끄덕였다.
결국 그가 외로운 사람인지 아닌지는 듣지 못했다. 다만 가슴속에서 이상한 것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어쩐지 나는 그 식사 자리 이후로 더 이상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 순 간에 꺼져버린 호기심이 , 그 사람을 향했던 관심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게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울 정도였으니까.
돈이 없기에 그림의 가치를 알고, 앞으로도 계속 그릴 수 있는 것이라 말하는, 타인의 주머니 사정까지 걱정해 10만 원 언저리의 수업료를 받으며 그림을 알려주는 아저씨는 코로나가 차차 회복되는 대로 또다시 벽화 봉사를 하실 거라고 했다.
아저씨와 전보다 가까워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아저씨가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고 그런다. 그냥 지금처럼 그 자리 그대로 오래 계셨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