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사실... 맞은 적 있었지."
엄마와 술을 한잔 기울이는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물음에 나의 귀에는 총성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전역할 때까지 너네 군생활은 내가 망쳐줄게.”
나와 동기들은 30분째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다. 내무반에 걸려있는 시계 초침 소리가 총성처럼 느껴졌다. 그 시계 아래에는 무섭기로 소문난 선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총성이 스무 번쯤 울렸을까, 선임은 ‘좆되기’ 싫으면 제대로 하라며 내 옆에 있는 동기의 배를 발로 찼고 그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군인이 된 지 고작 2개월, 난 어벙한 이등병이었다. 작대기 하나 달려있는 내 계급장 옆에는 ‘GOP 정예요원’이라는 배지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휘장의 대가로 머리나 가슴, 팔 같은 티가 잘 나지 않는 곳을 맞아야 했다. 운이 좋아 맞지 않는 날엔 20kg의 군장을 매고 GOP 능선을 뛰어다녀야 했다. 군대는 원래 이런 곳이라고, GOP를 지키는 우리는 더 엄격해야 하고 이쯤은 참아야 하는 것이라 교육받았다. 그들은 항상 교육 말미에 우리도 다 견뎠으니 너희도 견디고, 선임이 되면 똑같이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 냄새 맡으면서 잠들고 싶었다. 어릴 때처럼.
훈련소 입소하기 며칠 전, 엄마가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들, 사실 외삼촌이 한 분 더 있었어.”
외삼촌이 세 분인 줄 알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어렵게 꺼내놓은 외삼촌은 군 복무를 하다가 군대 내에서 의문사를 당하셨단다. 군에서는 자살이라고 판정했지만 폭행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외가는 군과 오랫동안 싸울 수 있을만한 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외삼촌은 의문의 타박상을 입은 채 자살한 군인이 됐다.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닥칠까 걱정했다. 난 누가 나를 때리거든 가만있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적당한 만큼은 참아야 한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당신의 오빠를 폭행으로 잃었으면서 아들에게 참으라니. 엄마는 군대가 '특수한 곳’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괜스레 오기가 생겨서 외삼촌도 그 때문에 돌아가신 거 아니냐고 했다.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는 외삼촌의 죽음에 억지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그를 잃었다는 분노를 삼킬 수 있기에, 군대니까 그럴 수 있다며 참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군대의 특수성이고 뭐고 절대 참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난 어떻게든 싸워서 부당함에 저항할 것이라 다짐했다. 외삼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았기에.
하지만 어느새 난 참고 있었다. 부조리를 신고하려 몇 번이고 전화기를 들었으나 이내 내려놓았다. 신고 후 내게 닥칠 상황들이 두려웠으니까.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피해받을까 무서웠으니까. 그럴 때마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고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나를 스스로 다그쳤다. 부적응자가 될 바에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남들도 다 참으니까 나도 꾹 참자고. 난 그렇게 총성을 내지 않도록 나의 방아쇠를 숨겨두었다.
그런데 애써 숨겨놓았던 불안한 방아쇠를 다른 이가 당겼다.
임 병장 사건과 윤 일병 사건이 터진 것이다. 총성의 도미노는 우리 부대에도 이어졌다. 선임병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GP에서 총으로 제 머리를 쏜 후임병. 선임이 후임에게 풍뎅이를 먹이는 일. 후임의 위장이 미어터지도록 음식을 먹게 하거나, 성폭행하는 사건까지. 부조리 사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발사되는 총탄처럼 탕, 탕, 탕 튀어나왔다. 외삼촌의 죽음은 반복되고 있었다. 사건과 희생자는 끊이질 않았고 변하는 건 없었다. 참는다고 해서 상황은 절대로 나아지지 않았다.
지독히도 괴롭히던 선임들이 전역하고 내가 그들의 계급이 됐다. 난 선임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고 이 부조리의 굴레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폭행, 기합 등의 악습을 없앴다. 선임이라고 후임들의 관물함을 엎지도 않았고, 얼차려를 주지도 않았으며 주먹으로 그들을 때리지도 않았다.
부조리가 사라진 군 생활은 이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폭행이 있어야만 GOP를 지킬 수 있다던, 원래 군대가 그렇다던 그들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거 없이도 우린 여전히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자 GOP 정예요원이었다. 다만, 배를 걷어차이던 동기는 우리도 당했는데 억울하다며 못마땅해했다. 부조리에 함께 힘들어하던 동기의 마음에 어느새 불합리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혐오하던 선임과 똑같은 말을 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고하지도 못하고 굴욕적으로 견뎠던 나와 다를 바 없는 느낌에, 묘한 동질감이 들기도 했다. 외삼촌의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결국 다르지 않았으니까. 나도 군대적 특수성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했으니까. 부조리를 신고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참자는 마음을 선택했으니까.
군대에서 맞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나니까 총성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번쯤 억울했던 그 일을 전부 일러 받치고 엉엉 울고 싶었는데, 짧은 이야기로나마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긍정적인 축에 속했다. 난 억지로 풍뎅이를 먹어본 적이 없으며, 얼굴을 가격 당하지는 않았고 구타로 죽음에 이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일들은 어느 군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총성은 나의 귀에서 사라졌을 뿐, 어디선가 누군가의 귀에서는 여전할 것이다.
군대는 특유의 폐쇄성을 가지고 있고, 인내심을 강요한다. 부조리한 일들까지 참으라는 식의 논리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피해자를 몰아가고는 한다.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유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참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을 부적응자로 낙인찍는 시선 때문이다. 이런 시선이 바뀌어야만 피해자가 줄어든다. 참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외삼촌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얼마 전, 군대를 갔던 대학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종종 헛것이 보이고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죄어오는 공포감 때문에 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진단 결과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라고. 결국 조기 전역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자 옛날 내가 느꼈던 사건들과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고, 마음이 바스러지는 듯했다.
많이도 애썼다고. 그동안 참느라고 고생 많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차갑게 꺼진 전화기에 빗방울이 몇 개 떨어졌고, 그러자 탕-하고 그날의 총성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