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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Aug 11. 2020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을 미워해도 될까?

맞지 않는 사람과 절교할 용기

이십 대 중반에 들어 비싼 구두를 산 적이 있었다. 원래는 꽤 비싼 브랜드의 제품이었는데, 세일 시즌에 맞춰 온갖 할인 쿠폰을 동원해 8만 원에 샀다. 이십 대 중반이 되었으니, 이 정도 구두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신어오던 운동화, 하지만 때가 많이 묻어 지저분해진 운동화는 잠시 넣어두었다. 주변의 반응도 좋았다. 내게 잘 어울린다고 했고, 보기에도 멋진 구두라고 평했다.



그런데 문제는 큰 마음먹고 산 구두가 내 발과 잘 맞지 않았다.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이 신발에 눌려서 걸을 때마다 아팠다. 처음엔 남들보다 큰 내 발을 탓했다. 남들은 모두 편하고 멋있고 좋다는데, 왜 나한테만 안 맞는 거지? 내 발이 이상하게 생겼나 싶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걷지 않고 잠깐 걸을 때는 괜찮았으니까 그냥 신었다. 이렇게 신다 보면 알아서 길 들여져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즈음 한 프로젝트 그룹에서 A를 알게 됐다. 그는 인기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인기가 많았고 딱히 이렇다 할 싫은 점이 있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니, 나도 그를 좋아해야만 할 거 같았다. 그래서 난 그와 적당히 어울리며 관계를 쌓았다.



A는 평판만큼 괜찮은 사람이었다. 열정적이었고 똑 부러졌으며 직설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막힌 점이 있으면 특유의 성격을 살려 지지부진한 속도를 올려주었다. A는 그런 점들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흠... 뭔가 싸하단 말이야... 뭔가가...


하지만 모두가 사랑했던 그 점들이 나에겐 조금 거슬렸다. 나는 그의 열정과 발맞춰 따라갈 에너지가 없었고 그의 똑 부러지는 면은 어딘가 냉정하게 느껴졌으며, 그의 직설적인 면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다른 이들과 A를 함께 봐야 했을 땐 어딘가 불편했지만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모두가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점들이 내겐 별로라고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받느니 그냥 내가 A를 감내하기로 했다. 내가 보지 못했던 면이 A에게 더 있을 수 있고, 오히려 그 점을 보지 못한 내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그가 특유의 화법으로 은근히 나를 불쾌하게 할 때마다, 그래- 그래도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닐 거야- 하면서 애써 외면했다.




그날은 A를 포함해 친구들과 다 같이 맥주를 한잔 하는 날이었다. 그날도 새로 산 구두를 신고 나갔다. 술자리에서 각자의 연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가 결국 나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려버렸다.


"강산 씨는 훤칠하고 잘생겨서 인기 많은 거 같은데, 왜 애인이 없어요?"


애인이 없다는 나의 말에 친구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냥 분위기를 풀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그러자 A가 말했다.


"강산 씨가 잘 생긴 편은 아니죠. 얼굴에 살이 많아서 동그랗고, 팔다리가 얇아서 훤칠해도 티가 잘 안 나는 거 같아. 강산 씨 만나기 전에 소문 들었을 땐 잘 생겼다고 해서 되게 기대했었는데."


내가 잘 생기지 않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잘생겼다는 말은 오버스러운 칭찬이었고,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나의 외양을 평가하며 말하는 A의 말은 내게 아주 불쾌했다. A는 이렇게 은근히 나의 신경을 긁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해버렸다.


"A 씨. 저도 A 씨 외양 평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안 하는 거예요. 사람의 외양을 평가질 하는 건 무례한 거니까.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요. 이런 거 꼭 말해줘야 하는 건가."


참는 거 안 해 이제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싸해졌다. A는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다른 친구들은 A가 워낙 직설적으로 말하는 타입이라 그렇다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발이 너무 아팠다. 하루 종일 그 구두를 신으니까 발이 너무 아파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어정쩡하게 걸어 집에 도착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며 보니까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에 검붉게 피가 굳어있었다. 그제야 상처투성이인 내 발을 발견했다.



샤워를 하고 나서 굳어버린 피를 손톱깎이로 떼어냈다. 그래도 살을 떼어내는 거라 떼어낼 때마다 따끔거리며 아팠다. 그래도 딱딱딱 손톱깎이의 소리를 들으며 살을 떼어냈다. 살을 떼어 내며 구두를 처음 산 날과 A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고, 구두를 길들이려고 했던 날과 A와 잘해보자고 나를 다그치던 날을 떠올렸다. 결국 구두도 A도 나를 아프게만 했는데... 아픈 걸 알면서도 왜 길들이려고, 나를 거기에 맞추려고 했을까.



굳어버린 피를 전부 다 떼어내고 내 발을 다시 보았다. 하얬다. 발이 고생한 거 같아 괜히 울적해졌다. 고생시킨 거 같아 미안함도 느껴졌다. 고생했다고 마사지를 좀 해주고 풋 크림도 발라줬다. 떼어낼 때는 따끔거리고 아팠는데, 그냥 그대로 둘까 싶기도 했는데, 괜찮아졌다.




더 이상 맞지 않는 구두는 신지 말자고 생각했다. 나와 맞지 않는 A와도 더 이상은 함께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애쓴 나를 다독여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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