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어서 좋겠다.
내가 그 나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전 회사의 부장님은 내게 이런 말을 자주 했었다. 아직 이십 대라서 좋겠다고, 어리니까 해볼 수 있는 게 많지 않냐고. 자신이 그때로 돌아간다면 더욱 치열하게 살면서 미래를 준비할 거라고 말했다.
올해는 회사 생활을 10개월 정도 했고, 어른들이 보내는 젊음에 대한 다양한 유형의 동경을 받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 각각이지만 눈빛은 대개 비슷하다. 내 나이 때 즈음의 자신을 돌아보는 듯한 눈빛이다. 어떤 이는 너무 일만 했기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어떤 이는 그땐 공부만 했으니까 술 마시고 연애하며 놀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들은 이내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마치면, 너의 젊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활용하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느니, 너무 소모적으로 살지 말라느니...
안타깝게도 나보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들이 하는 그런 말들은, 내게 피상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 나의 청춘이 정말로 아름다워 보일까?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왜 나에게 젊음이란 불안하고 금방 시들어버릴 것만 같은 걸까.
그건 아마 올해의 내 청춘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인 거 같다. 돈을 벌기 위해 회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회사란 일만 하면 끝나는 곳이 아니었고 월급은 푼돈이었다. 난 그 몇 푼의 월급으로 학자금을 갚아야 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일주일 동안 카레만 먹거나 컵라면으로 때운 적도 있었다. 가끔 스스로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엔 그마저도 먹지 않고 굶기도 했다. 야근과 주말출근도 불사해야 했다. 그럼에도 주위에서는 여전히 내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주는 이는 없었다. 평생 회사원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꾸준히 글을 쓰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일을 하고 나면 녹초가 돼서 도저히 글을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연애나 노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연애는 가벼운 불장난으로 지나갔고 놀 때도 다음 날의 업무를 위한 에너지를 위해 사려야 했다.
그러니, 비좁은 나의 자취방에 걸린 전신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남들에 비해 꽤나 보잘것없어 보였다. 난 매일 아침 일어나 그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젊음을 확인하고 일하러 나갔지만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속에 비친 나는, 몇 푼을 벌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일어나 밤까지 일 하는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나의 젊음을 부럽다고 했던 그들은 도대체 뭐가 부러웠던 걸까. 청춘은 어떤 모습이어야 잘 사는 걸까. 부장님이 말한 대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다 바치는 것? 누군가의 말대로 여행을 많이 가는 것? 혹은 사랑에 많이 빠져보는 것?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나는 하고픈 걸 다 하고 살기에는 뒤따르는 대가를 두려워했다. 일에도 사랑에도 노는 것에도 여행에도 난 뒤따르는 대가들을 신경 쓰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젊음을 화려하게 보내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커리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나, 꿈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나, 화끈하게 놀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 누가 됐든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난 일도 사랑도 꿈도 애매하게 하면서 젊음을 보내 버리는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난 나의 이런 모습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나만의 젊음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면서 사는 것이 아름다운 젊음이라면, 난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다. 누군가가, 제대로 한 것 하나 없이 애매한 청춘을 보낸 나의 젊음이 보잘것없다고 말한다면, 뭐 어쩔 수 없다. 난 내가 누릴 수 있을 만큼의 젊음만을 누리고 있는 거니까.
내게 주어진 젊음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나 남았는지 보다 내가 스스로를 위해 애썼던 젊은 날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래. 올해의 내 젊음이 누군가의 젊음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난 나의 젊음을 내 방식대로 보내고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