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만 당해봐서 살리는 방법을 모르겠네요.
탄탄대로보다는 굽이진 산기슭 같고, 잔잔한 일직선보다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란 설명이 나에겐 친숙하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미술은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야 겨우 시작했고, 고등학교 3학년 8월 말에 갑작스레 이사 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따라 혼돈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당시의 난 내가 미대에 입학할 수 있을 거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입시학원에서는 그동안의 그림실력과 모의고사 성적, 학생부 기록을 바탕으로 인서울을 목표로 커리큘럼을 짜주었다. 나와 비슷한 성적과 비슷한 그림의 친구들이 한 곳에 모여 밤낮으로 10시간씩 그림을 그려대니 사실 큰 걱정은 없었다. 모의고사 때처럼만 성적이 나와주면 되는 거였다. 그림도 하던 대로만 그리면 되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젠장, 대차게 수능을 말아먹었다. 처참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원하는 만큼 성적이 안 나왔다. 내면 한가운데엔 이유 모를 "불안"이 가득했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뭔지 물어볼만한 어른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다. 망해버린 수능 성적에도 불구하고, 목표했던 대학교 중 가장 하위권(그래도 인서울이었다)의 실기 시험이 꽤 괜찮았는지 빠른 예비 번호가 떴다. 우리 미술학원 고3 수험생 중 유일한 예비번호 합격자였다. 정시 2차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옆 친구의 바람 탓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 예비 떴다며? 그럼 정시 2차 안 봐도 되는 거 아니야?
너 진짜 잘 그렸나 보다. 어떻게 우리 중에 너만 예비 떠?
여기서 뭐 하러 그림 그리고 있어. 그냥 집에 가서 숴~"
격려인지, 질투인지, 비아냥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들을
애써 한 귀로 흘리며 서걱서걱 종이에 흑연을 남겼다.
지금 이 이야기가 이곳에 기록되었다는 건 내 입시결과가 모두 불합격이라는 증거겠지. 한 달에 몇백만 원씩 들어가는 미술입시를 또 한 번 지원해 줄 여유 같은 건 우리 집에 없었다. 2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고, 걔는 또 공부를 잘했다. 내 재수에 투자하기보단 동생의 과외비로 쓰이는 게 더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당시엔 분명 나에게도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테지만, 그냥 미술 같은 건 포기하는 게 내 앞에 놓인 선택지였다. 슬퍼하고 고민해 볼 시간 같은 건 없었고 당장 노트북을 켜 두드려야 했다. 전문대의 문을.
'아, 꿈은 꿈으로만 남겨두어야 하는 건가.
난 꿈을 꿀 여유조차 없구나. 아님 의지가 없는 건가. 형편없네.'
그렇게 3년 남짓 꽃 봉오리를 맺기까지 애써온 미술의 꿈을 접은 채, 정시 2차로 전문대라도 입학해야 했다. 딱히 특출 나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던 학생부와 수능성적은 3년제 전문대에 입학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학교는 근처 경기권, 수원이나 안양에 있는 곳으로 가면 되겠고, 문제는 과 선택이었다. 그때라도 미술 관련 학과를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각종 디자인과가 수두룩 했으니까. 자존심인지 아집인지, 순수미술 아니면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내가 배우고 싶었던 건 서양화였으니까.
그렇게 각종과 목록을 스크롤하다가 문득, 내 눈을 사로잡은 과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보육과'였다. 졸업하면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과 보육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단다. 오 자격증 두 개나? 개꿀. 뭐 이런 마음은 아니었다.
"너 대학 가면 엄마아빤 이혼할 거야.
너만 있었으면 엄마가 어떻게든 이혼했는데, 니 동생까지 있는 바람에 아빠랑 못 헤어졌어. 그러니까 니 동생은 네가 잘 돌봐야 하는 거야. 애 없을 때 이혼하려고 했는데, 피임했는데도 네가 생겼잖니. 엄마 인생 네가 힘들게 한 거니까 엄마말 잘 듣고, 니 동생 잘 돌봐야 해. 착한 딸?"
이유 모를 "불안"은 내 존재에 대한 무가치함이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네네만 읊조리던 나 자신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좋은 엄마란 뭔지, 좋은 어른은 어떤 모양으로 핏덩이를 돌보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말들을 해야 한 명의 어린이를 겉 껍데기만 있는 풍선처럼 망가뜨리지 않고 자신감 넘치게 키울 수 있는지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날 살리기 위해 배워보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