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두고 하는 몰입

그래도 괜찮은 이유

by 강설

올해 들어 공휴일이 금요일일 때가 꽤 잦았다. 8월 15일 광복절 역시 금요일이었고, 덕분에 남편과 나는 국내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차로 이동하기에 무리되지 않으면서 한적하고, 수영장이 있으며 하늘이 잘 보이는 곳.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숙소를 고르고 골라 마침내 가평으로 결정했다. 리조트라고 명명된 그곳은 바비큐 장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숙소 체크인을 하기 전 마트에 들러 두툼한 고기와 한 입에 먹기 벅찰 만큼 커다란 마시멜로를 골랐다. 장보기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남짓의 여유가 있었고, 주차가 편리하고 실내가 쾌적할 스타벅스로 향했다.


"저희 주문이 좀 밀려있어요. 1시간 정도 소요되실 텐데, 괜찮으세요?"


계산대 앞에 서서 저는요,라고 주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점원이 말했다. 우리가 '아, 그럼 다음에 올게요.'라고 말하길 바랐겠지만 '네, 괜찮아요.'라고 말한 후 주문을 마쳤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의외로 좌석이 많았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필요한 것은 다 준비됐고 그럼 무얼 할까, 고민하다 한편에 마련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아직 첫 장도 넘기지 못한 책이 한가득이건만, 저 책장엔 분명 새로운 책이 있을 테니 지나칠 수 없었다. 찬찬히 눈으로 제목을 훑다 한 권 앞에서 멈추었다.



겉표지는 강렬한 레드였고 딱딱한 양장본이었다. ‘여자’, ‘교환일기’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속으로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책이 아니길 바라며 얇은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맘에 드는 문장을 발굴했다. 책에 밑줄을 긋고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는 독서를 즐기지만 내 책이 아니기에 사진으로 문장을 포획했다.


“이제 슬슬 나갈까?”


몰입하다 보니 어느덧 이동할 시간이 되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편은 핸드폰 화면을 보다 시간을 확인하고 내게 알려준 것이었다. 잠깐만요, 이 챕터까지만 읽을게요, 하며 다급히 요청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주차장 한 복판에 소방차와 구급차가 도착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남편에게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응급상황일 때에만 부르는 차가 두 대나 와 있으니 불길한 사건이 발생한 것일 테지만 그 순간 내게 중요한 건 벌건 책뿐이었다.


약속한 페이지까지 읽은 후 책을 책장에 다시 되돌려놓았다. 소동이 끝났는지 소방차와 구급차는 온데간데없고 빽빽하던 주차장도 한산했다. 한 시간 남짓 뙤약볕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더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숙소로 향하는 길, 문득 감사가 떠올랐다.


“우리가 같은 곳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사이라서 참 좋아요. 나는 책 보고, 여보는 구경해도 아무도 서운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당연한 건 아니니까요.”


어릴 적, 어머님과 함께 도서관에 갈 때면 남편은 만화책을 보는 동안 어머님도 마음껏 독서를 즐기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방금 우리의 상황이 익숙했다고.


요즘 잘 지내냐는 주변의 물음에, 싸울 일 없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대답하면 ‘그거 신혼이라 그런 거야’며 흘려듣는 사람들이 많다. 신혼이라고 모두 사이좋게 지내진 못한다는 걸 안다. 매일같이 우리의 일상 속 자그마한 순간이 서로 맞물리고 있다.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튀어나온 곳과 움푹 들어간 곳이 딱 맞아 잘 굴러간다기보다는, 수채화 물감을 붓으로 하나하나 옮길 때 생기는 물자국이 조화롭게 만나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이 더 알맞다. 다른 색깔의 우리지만 함께 집을 그려나가고, 식탁을 그리며 산다. 그릴 면은 충분하다. 때때로 원치 않은 곳에 물방울이 튀고, 정성스레 그린 것이 뭉개질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함께’ 그려 나가기에 결국 작품이 될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누리는 몰입도 좋지만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것에 몰입해도 충분히 괜찮은 관계라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