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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누리 Feb 04. 2021

#4. 나의 친구, 나의 동거인, 나의 그늘막

월급 90만원은 생각보다 차곡차곡 잘 쌓여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을 쓸 시간이 없었다. 월세, 휴대폰 요금, 공과금, 인터넷 요금 등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을 제외하곤 고스란히 통장에 남았다. 아침은 당연히 굶는 것이었고, 점심 한 끼만큼은 막내를 불쌍히 여긴 서브작가들의 배려와 방송국 식권으로 모자람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역시 굶기 일쑤였고 어쩌다 한번 큰 맘 먹고 치킨 한 마리 시켜먹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덩치에 비해 뱃골이 작아 치킨 한 마리를 3일씩 먹기도 했다.     


나의 유일한 기쁨은 쇠똥구리가 똥을 굴리듯 미세하게 불어나는 통장잔고를 보는 것뿐이었다. 그 말은 즉, 그것 외엔 즐거움이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시 절친 유은이는 취준생, 공시생의 길을 걸으며 나와 다른 고통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처지를 폄하하며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유은이의 취업 준비 생활이 길어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2년제 전문 대학교를 졸업한 후 만 2년, 햇수로 3년 동안 방황 중이었고 그 사이 이력서에 적지 못할 아르바이트 경력만 쌓여갔다. 유은이는 사람을 좋아했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스물 넷, 어쩌면 그것들이 너무 당연한 때. 하지만 취업 준비가 길어질수록 유은이와 부모님의 관계는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은이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도 그랬다. 다만, 나는 그 끝에 필연적으로 죽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나 올라갈게     


유은이는 나를 걱정했다. 그 애틋한 마음과 자신의 처지가 유은이를 움직이게 했다.     

 

2016년, 3월 1일. 서울 살이 만 2개월, 동거인이 생겼다.     


유은이의 짐은 단촐 했다. 가방 몇 개와 캐리어 하나였다. 흡사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를 한 모양새였다. 집이 좁은 것을 감안해 최소한의 짐만 챙겨온 듯 했다. 그러나 5평짜리 집은 이미 나의 세간살이로 포화상태였다. 겨우 눕고 발만 딛을 수 있는 공간이 전부였다. 괜히 민망하고 미안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유은이는 씩씩했다. 옷을 넣을 리빙 박스를 구입하고, 부족한 옷걸이를 구입하고, 이부자리를 사고, 일사천리였다. 어쩌면 첫 자취, 독립에 설레었는지도 모른다.    

 

유은이에겐 그저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겠지만 나에겐 유은이가 천군만마이자, 든든한 그늘막이었다. 가시밭 같은 현실에서 잔뜩 베이는 날이면 유은이는 웃는 낯으로 치킨이나 오돌뼈를 시켜놓고 나를 기다렸다. 그러면 맥주 한 캔으로 오늘을 나누며 웃고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유은이에게 위안을 받을 때면 나도 유은이에게 힘이 될 수 있길, 여기서 내가 버텨내는 것이 유은이에게 어떠한 희망이나 의지가 될 수 있길 바랐다. 

    

우리는 나름 청춘드라마에 나올 법한 동거의 재미를 찾곤 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동네에 작은 야시장이 열렸다. 먹거리와 소품 판매 부스, 다트 던지기, 사격 등의 게임 부스가 길을 따라 열렸다.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 정도가 즐길 수 있을만한 규모의 행사였다. 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나와 유은이는 서로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손에 쥐고 밤거리로 나설 때면 그 분위기에 취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유은이는 승부욕이 꽤나 대단한 편이었다. 인형을 쏴 떨어뜨리는 사격 부스에 만 원 가량을 투자하여 오리 비눗방울과 인형 하나를 얻어내기도 했다.     


오리 장식이 달랑거리는 길쭉한 비눗방울 하나로 어찌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모른다. 들고 뛰기도 하고, 가로등 밑에서 뱅글뱅글 돌며 동영상을 찍었다. 비눗방울은 어린이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스물 넷 성인에게도 꽤나 영양가 있는 놀잇감이었다.     


샤워 중 실수로 떨어뜨려 부러진 샤워기헤드조차도 우리에겐 장난감이었다. 녹슬어 부러진 샤워기헤드를 들고 유은이는 트로트를 부르며 춤을 췄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깔깔댔다.     


방충망이 노후된 탓에 여름이면 모기 전쟁이었다. 자다가도 모기소리만 듣고 잡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는 모기를 좀 더 신속하고 기술적으로 퇴치하기 위해 전기 파리채를 구입했다. 유은이는 그 모기채를 들고 사라포바 흉내를 내며 한 밤의 코미디 무대를 펼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유은이가 좋았다.    

 

우린 마치 가난한 부부처럼 월급날마다 패밀리 레스토랑을 갔다. 유은이는 올라오자마자 백화점 의류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나는 그 맘 때 쯤 90만원짜리 프로그램 졸업 후 140만원짜리 S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생활이 조금 나아진 것에 기뻐하며 나는 월급을 기념하자 했다. 우리는 매달 5일쯤 서로의 월급을 축하하며 목살 스테이크를 썰었다.  

   

매일 쿵짝이 잘 맞으면 좋았겠지만, 가끔은 다투기도 하였다. 웃는 이유가 사소한 것처럼 싸우는 이유도 사소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휴일이 겹치는 날, 걸어 20분 거리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워낙 영화 매니아였고, 유은이는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겨하는 편이었다. 다툼은 늘 준비하고 나가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나는 일어나 머리도 감지 않고 눈꼽만 겨우 땐 채 모자를 눌러쓰면 외출 준비가 끝나는 것이었다. 반면에 유은이는 샤워도 해야 하고, 화장도 해야 하고, 옷도 갖춰 입어야 하고, 할 일이 많았다. 나는 그런 유은이가 답답했고 참고 참다가 폭발하곤 했다. 유은이는 그런 나를 서운해 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될 말을 던져놓고 그것을 후회하며 암울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유은이는 내게 서운할 때면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나는 그런 유은이를 알고도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면 물리적 거리가 심적 거리만큼이나 멀어져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기에 마음이 조금 풀릴 때면 나는 가던 발을 멈추고 유은이를 기다렸다. 그러면 유은이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맞췄다. 결정적으로 화해를 신청하는 우리만의 싸인이 있었는데,     


“영화 보고 떡볶이 먹을래?”     


마치 의식처럼 우리는 떡볶이로 대동단결하여 화해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 각자의 소감을 나누며, 맛있는 떡볶이를 배터지게 먹는 것. 그것이 우리의 화해 방식이자 시간을 나누는 방법이었다.     


유은이와는 벌써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그녀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모두 풀어놓자면 7박 8일도 부족할 것이다. 유은이와 나의 동거는 1년 6개월 동안 이어졌고, 유은이가 경기도로 취업을 하며 떨어지게 되었다. 현재 유은이는 서울로 이직에 성공하여 3년차 직장인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는 가끔 유은이에게 우스개소리로     


“내가 너 서울에 자리 잡게 해줬잖아~”     


라며 뻗대곤 한다. 그 말에 유은이는 항상 동의를 표한다. 비록 작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누울 곳이 있었고, 나눌 곳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런 나에게 유은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네가 죽을 줄 알고, 너 살려보려고 온 거야”     


나는 아직도 그녀에게 이 감사함을 어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친구로 붙어먹으며 그녀의 삶에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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