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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누리 Feb 24. 2021

#5. 167cm, 85kg 살과의 전쟁

부모님 모두 모태 마름. 3.5kg으로 태어나 10살 무렵까진 꽤나 가녀린(?) 유년기를 보냈다. 학급에서도 꽤나 인기 있는 학생이었고, 팔다리가 얇고 길어 패션을 좋아하는 엄마의 센스를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     

문제는 한약이었다. ‘한약을 잘 못 먹어서’라는, 변명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멘트는 사실이었다. 동생이 미처 자라기 전, 엄마는 장녀의 건강을 위해 한약 한 채를 달여 먹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한약방 앞을 그냥 지나지 못했다. 그 신비로운 약재향이 어떤 섬유유연제나 맛있는 음식 냄새보다 나를 더 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한약은 음료수와 같았다. 은근 달큰하면서도 쌉싸래한 그 맛이 죽여줬다.     


동생이 어느 정도 자라자 엄마는 또다시 한약을 지어왔다. 나보다 훨씬 마르고 기운이 허한 동생 것이었다. 엄마는 손이 두 개인데 하나만 챙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 것까지 두 채를 지어왔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한약 파워를 받은 나는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위로만 자랐으면 좋았겠지만 가로 세로 골고루 자라난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키 164cm, 몸무게 65kg를 기록했다. 늘 내 자리는 맨 뒷자리였고, 못돼먹은 남자아이들의 놀림 표적이 되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체력 증진과 다이어트 목적으로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운동 버프를 받아 내 기골은 더욱 장대해져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의 별명은 ‘피오나(슈렉 아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본래 극도로 내향적이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며 많은 사람들과 오래 어울리면 기가 쭉 빠져버리는, 그런 타입의 아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점차 살이 찌면서 원치 않는 주목을 받게 되고, 놀림거리가 되며 나는 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가면을 덧대기 시작했다. 활발하고, 적극적이며, 재미있는 나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뚱뚱한데다 말 수도 적고, 혼자 다니고, 사람들이 있는 자리를 피해버리면 음침한 애로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시작된 연극을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하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지 모른다.     


살은 꾸준히 올랐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엔 70kg를 훌쩍 넘겼다. 인기 있는 브랜드의 기성 교복은 사이즈가 없어 맞춤 교복을 입어야 했다. 맞춤 교복은 10~20만원대. 그 때 당시 브랜드 교복 값이 50만원까지 치솟았었으니, 뜻하지 않은 효도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겪어보는 환경에서 나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받을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 액션을 취했다. ‘너희들이 나를 놀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놀려주겠다’가 나의 전략이었다. 돼지 모양 실내화를 신고, 터져나갈듯한 나의 와이셔츠와 조끼 단추를 더 드러내며, 희한한 표정과 행동으로 광대를 자처했다. 덕분에 내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었다. 나를 재미있어하고 친근해했다. 개 중엔 진심으로 마음을 나눈 친구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교우관계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별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힘을 과시하기 좋아하고 남을 낮추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는 부류에게 나는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꽤 좋은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물리적인 해코지는 없었지만 나에게 우스운 행동을 강요한다거나, 쉬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자리에서 비켜주지 않는다거나, 뒤에서 다 들리게 나를 비웃는다거나 하는 행동은 서슴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은 날이면 나는 폭식을 했다. 울룩불룩한 내 몸뚱이가 보기 싫어 거울을 덮어놓고 손에 잡히는 데로 먹었다. 음식물이 목 끝까지 차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먹었다. 부른 배를 쥐고 헉헉대면서도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끊임없이 입에 넣었다. 토요일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전쟁 같은 일주일을 무사히 살아낸 것에 자축하며 라면 두 봉지와 떡사리, 계란,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먹고 낮잠을 잤다.     


그리고 내 몸무게는 85kg이 되었다. 먹는 것은 꾸준했으나 여기서 몸무게가 더 오르진 않았다. 마치 그 무게가 내가 된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나는 살찐 삶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간혹 다리가 저린 것도, 무릎이 아픈 것도, 숨이 찬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족 중 그 누구도 나에게 살을 빼라거나, 보기 싫다거나 하는 종류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밖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욕하는 것 같았다. 특히 늘씬하고 예쁜 엄마 옆에 서있으면 내가 실패작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의 숱한 데이트 요청에 나는 짜증으로 일관했다. 어쩌다 한번 마음이 동해 나가게 되더라도 결말은 항상 암울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맞지 않는 기성복에 몸을 욱여넣다 결국 울컥하고 마는 나, 그런 나에게 상처받는 엄마. 나에게 옷 쇼핑은 지옥이었다. 매번 반복되는 싸움이 싫고 지겨웠지만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 교복 위에 기모 후드티를 껴입고 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 그날, 그 상황에 불행이도 뒤늦게 하교를 하던 질 나쁜 무리의 눈에 띄게 되었고 나는 치욕스러운 대화를 고스란히 내 두 귀로 받아내야 했다.   

  

“아, X 추워~”

“쟤한테 벗어달라고 해”

“누구? 쟤? 큭큭, 쟤는 홀딱 벗고 있어도 안 춥겠다”

“이미 지방을 껴입고 있잖아”

“야~ 나 위에 그거 하나만 벗어주라~”     


알량한 자존심이었는지,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 대화를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창피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흩날리는 눈발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킥킥대며 나를 놀리던 무리가 자리를 뜨고 나는 아찔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집으로 달음박질 쳤다. 평소 눈물이 매우 많아 곤란하기까지 했던 나였지만 희한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소리 큰 벌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웅- 웅-하며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벌.     


보통의 책이나 드라마, 영화 서사를 따르자면 이 충격으로 내가 살을 빼기로 다짐했다, 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나는 살을 빼지 않았다. 여전히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착실히 내 몸뚱어리를 불려나갔다.   

  

다이어트 결심은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생겨났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서였다. 입학하게 될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교복이 예쁘기로 소문난 학교였다. 지역 인문계고 교복 중 단연 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교복을 예쁘게 입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을 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수첩을 하나 샀다. 하루 종일 수첩을 내 몸에 끼고 다니며 내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의 칼로리를 적어냈다. 하루 섭취 칼로리는 1800칼로리를 넘지 않았다. 잘 때,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앉거나 눕지 않았다. TV를 볼 때도 운동을 하면서 보거나 그 앞을 서성였다. 6시 이후로는 물을 제외한 어떤 것도 먹지 않았으며 매일 저녁 6시엔 겨울 체육복을 껴입고 제자리 뜀뛰기 3000개, 다이어트 비디오 따라 하기 40분, 막춤추기 10분으로 운동을 하고 반신욕을 하며 땀을 뺐다.     


그렇게 3개월을 하고 나니 몸이 가벼워짐과 동시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위가 좋지 않아 거의 매일을 복통에 시달렸다. 한참을 굶다가 뭔가를 먹으면 꼭 탈이 나 설사를 했고 그럴 때면 수액, 영양제를 맞아가며 버텨야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56kg의 몸무게로 교복을 입을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즐거워졌고, 더 이상 옷을 사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나를 보고 비웃는 듯한 망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나는 다이어트에 성공함으로써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모든 것들은 아주 찰나였다.     

날씬한 몸이 주는 기쁨은 크지 않았다. 더 다양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 친척 및 지인들의 걱정(의 탈을 쓴 비난과 조롱)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오히려 다이어트로 망가진 위장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급하게, 무리해서 뺀 살이라 그런지 살이 다시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이어트 전으로 완전히 돌아가진 않았지만 다이어트 후 무게를 유지할 순 없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뺀 살이 다시 돌아오고 있음에도 나는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오르는 몸무게가 생각보다 걱정스럽지 않았다.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이, 나누는 음식이, 나누는 대화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은연 중 살이 빠지고 환골탈태하면 내 삶이 180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착각이었다. 대단한 착각. 내 삶은 생각보다 크고 거대하며, 꽤나 복잡했다. ‘살’ 말고도 많은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더 중요한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날씬한 몸이 나에게 주는 자존감이나 만족감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았다. 그리 정성을 들여 얻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사라질 때 크게 아쉽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살과의 전쟁 중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숱한 다이어트를 겪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날씬하고 ‘보기 좋은’ 몸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을 ‘살을 빼야 하는 이유’의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두려 애쓰고 있다. 나는 건강하기 위해 운동하고, 건강하기 위해 먹는다. 외형의 완성을 목표로 다이어트를 이뤄냈을 때 내가 어떤 사고를 하고 어느 정도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지, 이미 나는 경험했다. 그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건강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건강한 소통을 하기 위해,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건강하게 해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살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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