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두려움이 남긴 상처

열지 못한 마음(1997, 파리)

by 강희란

Ep 02-1. 두려움이 남긴 상처: 열지 못한 마음(1997, 파리)


"사랑이란 감정이 두려워 우린 늘 떨어져 있었다”

— 영화 <타락천사(墮落天使)> (1995)

사랑이 두려웠는지 세상이 두려웠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중요한 건 '나'보다 '세상'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데미안의 연약한 새였다.


: 1997년, 파리 플랫폼. 그리고 밤기차의 추억


더디게 사랑했다.

빠져버릴까 두려워서.



그해 여름, 나는 스물 다섯이었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했다.

HOT와 젝스키스가 인기가요를 휩쓸었고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가 연일 뉴스를 도배했다.


노동운동을 가장 열심히 했던 선배들이 가장 취업에 열심이었다.

아이러니했다.

결국 이상은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었던 나는

지하철역 앞 토스트를 아침마다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아주머니의 손이 어떻게 그렇게 능수능란한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그 손놀림 하나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손을 따라 넋을 잃고 보고 있자면

어느 새 김이 솔솔 나는 토스트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뜨겁고 달콤한 바삭감.

입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

바로 이게 사는 맛이지.


지금도, 그럴 때가 있다.

먹고자 사는 건 아니었지만 살다 보면 먹는 게 위안일때가 있다.


당시에는 항상.

다 읽고 누군가가 놓고 간 신문들이 지하철 선반위에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그들의 친절함 덕분에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나는 공짜로 볼 수 있었다.


한화 이글스의 골수 팬이었던 나는.

늘 장종훈의 홈런 소식을 기다리며 스포츠 신문을 노렸다.



일반 신문을 집어든 날은 십자낱말풀이는 필수코스였다.

그렇게 긴긴 통학시간을 달래며 지루했던 대학원생활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옛날엔 그런 친절함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염원이 공기중으로 통하던 시절.

옆자리 아저씨가 들고 있던 신문칼럼을 훔쳐보며

아저씨가 혀를 찰 때 나도 따라 혀를 찼다.


애국심같은게 아니었다.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안부를 끝내는 나라.

한국사람들이 가진 특유의 내 사람 챙기기.

내 가족 챙기기. 내 나라 챙기기.


아마도 ‘정’이라고 불리는 그 감성.

그런 게 상식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


대학원에서 쉬는 시간에는 PC로 게임을 하거나 통신을 했다.

너나 할 것없이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나는 영퀴방,만퀴방에서 하루 종일 살았다.



영화 접속의 한장면

졸업이 가까워오던 때.

밴쿠버에 가 있던 선배 하나와 영어로 메일을 주고 받는 연습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학연수의 붐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후의 진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밴쿠버로 향했다.

내 인생의 첫 비행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하니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선배가 소개시켜 준 한국 언니들의 도움덕에.

나는 몇 달만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호의만으로 나를 도와준 그 언니들에게는 깊은 감사를 표한다.


영어실력을 늘리기 위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했다.

그렇게 내 의지로 공부를 열심히 해본 건 처음이었다.

다행히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언니들의 제안으로 유럽여행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언니들은 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혼자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무모하다고 느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취소 수수료 40%를 감당할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예정대로 떠나는 것뿐.


영국에서 시작된 여행은 혼자만의 여행이었지만.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커피와 크루아상 냄새가 가득했다.


도착한 플랫폼에서는 낯선 프랑스어가 울려 퍼졌고.


그 이국적인 언어 속에서 들려온 한국어 몇 마디.

본능적으로 나의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타국에서 만난 배낭여행자들은 서로를 금방 알아본다.

특히 한국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 행선지가 겹치곤 했다.


키 180에 안경을 쓴 서글서글한 얼굴.

생활력이 강해 보이는 스타일. 붙임성있는 웃음.

눈에 띄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혼자 배낭여행 중이라는 말 한마디에

무리사람들이 나를 둘러쌓았고.

그렇게 우리가 된 나는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향하는 밤기차에 올랐다.


스페인은 집시가 많고 치안이 좋지 않다는 악명을 익히 들었던 터라,

낯선 타국에서 만난 우리들은 순식간에 '전우애'로 똘똘 뭉쳤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소음과 진동속에서

남자들은 번갈아 불침번을 섰고,

여자들은 서로의 가방을 베개 삼아 안고서 선잠을 잤다.


가난한 배낭여행이었던 탓에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한국사람 특유의 연대감은 이런 곳에서 발휘되는 법.


낯선 곳에서의 고립감은 우리의 연대를 바닥부터 끓어오르게 했다.

작은 것도 나누어 먹고 조금의 수고에도 모두가 달려들었다.


문득, 규칙적인 열차 소리만 들리는 어둠 속에서,

내 옆에 앉은 그와 눈빛만으로 모든 게 통하는 것 같았다.



스페인 여행의 끝자락에서 각자의 루트로 흩어지려는 찰나.

나는 이탈리아 로마로 향하기로 했다.


서로의 루트를 확인하던 순간,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자기가 가봤으니 안내해주겠다고.

일분 일초가 아까운 유럽여행에서 갔던 곳을 되돌아간다니.

그의 호의가 투명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낯선 곳이라서 그랬을까.

그동안 보여줬던 그의 따뜻한 눈빛과 섬세한 배려가

내 마음을 살짝 움직인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게 나의 두번째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3주간의 여행 중 2주를 그와 함께 보냈다.

14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깊이는 남달랐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게 깊이라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브뤼셀에서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기차역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로마에서는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붙이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들이어서 아무 일도 없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밤을 지낸 우리의 아침은

지난밤과는 살짝 다른 공기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피렌체 두오모를 물들이던 석양에,

뮌헨 브로이하우스의 맥주 거품에,

프라하 카를교 위 가로등 불빛에 그를 담았다.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늘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은 늘 끝이 있는 법.

그렇게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서로 약속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IMF가 터졌다.


[다음 화 예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 다시 나타난 사랑."

Ep 02-2 (1997,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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