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아름다운건 어딘가에 순수한 내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외국계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서른이 갓 넘었고.
대리에서 과장이 되어 일로 바쁜 시기였다.
그 해. 말 많았던 무더위가 막 지나가고
장비셋업으로 유난히 바빴던 어느 날.
푸른 하늘이 다시 눈에 들어오던 어느 시간.
S전자 자판기에서 싸구려 커피를 꺼내들던 순간.
뒤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에.
나는 몸이 굳었다.
돌아보기도 전에 알았다.
심장은 머리보다 기억력이 좋다.
몸은 언제나 머리를 앞선다.
내 심장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심장이 두근거렸다.
닫아두었던 서랍이 예고 없이 갑자기 열린 기분.
그 시절 그의 옆에서 술에 취해 맡던
짠내 나는 바다 내음이
커피향과 함께 떠올랐다.
지나치게 뜨거웠고 텁텁했던
자판기 커피가 다 식어갈 즈음.
모터 돌아가는 무미건조한 기계음을 배경 삼아
우리는 밋밋하게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어색한 안부 사이에서 침묵이 길어졌고.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눈빛이 오갔지만.
우리는 서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결혼했다는것.
아이가 있다는 것.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
남들이 아는만큼 나도 알고 있었다.
이별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하면
스폰지처럼 속속들이 알게 되더라도.
이별하면.
남들이 아는 만큼만 알게 된다.
서른이 넘은 그는
조금 나이가 들어 있었다.
훤칠한 키와 콧날은 여전했지만
같이 바라보던 하늘은 이곳에 없었다.
갑자기, 유독 그와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무언가 살짝 불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라 어색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목에 걸려 있었던 말들을
차마 뱉어내지 못해
느껴지는 불편함이었을까.
그를 보내고 뒤돌아섰을 때.
나는 이 이질감의 출처를 깨달았다.
그를 그리워했다고 줄곧 생각해왔지만.
정작 그리워했던건
그가 아니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그시절 진심으로 순수하게 사랑했던.
그 시절의 서툰 '나'였다는 것을.
하얀 도화지에서 그었던 첫 선은
비록 완성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의 그 루머들, 사실이었을까.
확인했다면 어땠을까.
어떤 문장은 마침표를 찍지 않는 편이 낫다.
끝내지 않아야 끝나는 것들이 세상엔 존재하기 때문이다.
눈을 감은 건 겁이 나서였고,
겁이 난 건 그만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 순수하고 비겁했던 스무 살을,
그리고 하늘 한 조각을 나눠 가졌던 그 계절을,
그 미완의 문장 속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하지 못했던 말의 유통기한은 만년이다]
"그때 내 하늘은 너로 가득 차서, 네가 사라질까 봐 옆을 보지 않았어.
내 비겁함은 사실 너를 잃을까 봐 떨었던 가장 서툰 사랑의 고백이었어."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떠오르는 얼굴.
오래전에 끝났는데 가끔 심장이 기억하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린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부족한 건 아니다.
다만 그때의 설렘과 두근거림의 안에 있던 내가,
아직 어딘가 나의 심장 속에 살아 있다는 뜻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사막이 아름다운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아름다운건,
어딘가 '그때의 순수했던' 내가 어딘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랑은 시작의 자국이다.
시작은 늘, 오래 남는다.
그시절, 당신의 첫번째 자국은 어땠나요?
[다음 화 예고]
"스물다섯의 여름, 낯선 이국 땅 밤기차에서 시작된 나의 두 번째 사랑"
Ep 02-1. 두려움이 남긴 상처: 열지 못한 마음 (1997,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