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수화 Jan 03. 2022

단감



 시골에 있는 친지로부터 주문한 단감이 왔다. 요즘 들어 부쩍 잔소리가 심해진 남편이 조금씩 사 먹으면 되지 뭐 하러 많은 양을 사서 헤프게 소비하냐며 가시 돋친 말을 내 뱉었지만 들은 척 만 척 나는 감 박스를 열어서 가깝게 지내는 이웃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식탁 위에도 한 소쿠리 올려놓았다.


 집 안에 굴러다니는 감을 남편과 아이들은 식탁의 데코레이션(decoration)이거니 하는지 먹을 생각은 않는다. 내가 주로 먹다가 남으면 물러져서 버릴 때도 있다. 그러다가 감이 다 떨어지면 또 주문해서 그 과정을 되풀이하다보니 남편의 잔소리도 무리는 아니다.


대형마트나 과일가게, 동네슈퍼마다 지천으로 널린 것이 단감이요, 가격도 비싸지 않아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라 남편 말대로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사면 될 텐데 한꺼번에 많이 사서 쟁여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은 감에 대한 나의 지나친 애착 때문이다. 떨구지 못한 과거의 어두운 기억 자락 끝 단감이 매달려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엔 감나무가 많았다.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대부분 보통 감나무였고 단감나무는 이상하게도 귀했다. 봄이면 온 동네에 노란 꽃이 만발했다. 벌들이 윙윙대는 아래서 우리는 감꽃을 실로 엮어 목걸이나 팔찌를 만들며 놀았다. 한여름에는 그늘에서 놀다가 배가 고프면 덜 익은 감을 따 먹기도 하고, 가을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을 바라보며 잎이 빨리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이파리가 다 떨어져야 제대로 맛이 나고 떫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긴 장대로 딴 감은 큰 독에 넣어 겨울에 먹을 간식용으로 비축하고 나머지는 서리를 맞히면서 홍시가 되면 하나씩 따 먹는다. 눈 오는 겨울엔 큰 독에 넣어 둔 것을 하나씩 꺼내 먹는데 살짝 얼은 그 맛은 요즘 백화점에서 파는 홍시 샤베트 맛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감나무를 배경으로 한 어린 시절의 풍경화는 아름답게 펼쳐지다가 결국 슬픈 회색 빛깔로 막을 내린다.


  동네에는 단감나무가 딱 한 그루, 마을의 가장 부잣집 사랑채 뜰에 있었다. 먹을 게 귀한 시절이어서 단감이 열리기만 하면 채 영글기도 전에 누군가 다 따 가버렸다. 그 집 사랑채 벽면엔 비료 푸대 종이 뒷면에 ’감 따다가 덜키마 다리몽데이 뿌러질 줄 아라라’ 는 무시한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경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감나무에 달린 감은 붉은 색이 돌기도 전에 밑가지부터 점차 없어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은 가지에 매달린 감을 따느라 사랑채 지붕에 올라가는 바람에 기왓장이 깨진다며, 가끔 동네 이장이 스피커로 아이들 단속하라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해마다 기와 몇 장씩을 걷어내고 새로 갈아야 했으니, 단감나무집 영감이 동네 개구쟁이들을 미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다 길 가다가 부잣집 영감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빌어 묵을 넘의 새끼들’ 이란 욕을 들으라는 듯이 내뱉었다. 꼭 누가 땄는지 알고 하는 소리 같아서 온몸이 얼어붙곤 했다.


 우리 집에는 나와 연년생인 말썽꾸러기 오빠가 있었다. 엄마는 늘 그 오빠에게 부잣집 근처 얼씬도 말라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빠가 나에게 악마의 말을 속삭였다.

-내 따라와서 망 봐주면 내가 너 절대 안 때릴 게.

 오빠는 부잣집 영감이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동구 밖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한적한 오후 어른들은 들일하러 가고 동네에는 아이들조차 꼴 베러가고 없었다. 금단의 열매에 대한 유혹이 부잣집 영감과 엄마의 무서운 얼굴을 이기고 결국 오빠를 따라나섰다.

 드디어 단감나무 아래 도착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오빠는 다람쥐처럼 사랑채 지붕 위로 가뿐히, 나무를 타고 올라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주황빛 붉은 기운이 감도는 감들이 우두두둑 떨어졌다. 몸이 굳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얼른 주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개씩 집고 있는데, 오빠가 나무에서 기와지붕으로 날듯이, 땅으로 고꾸라지듯 뛰어 내렸다. 닥치는 대로 주워 내 치마에 안기고, 남은 것은 자신의 윗도리를 벗어 순식간에 다 쓸어 담았다.

-빨리 가자!


 오빠를 따라 강씨 문중 사당으로 잠입했다. 사당 뒤에 수북한 건초더미가 쌓여있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누군가 들락날락 했던지 안에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다.

 옷을 펼쳐 바닥에 감을 쏟고는 비로소 먹기 시작했다. 입 속에서 퍼지던 그 아삭한 단맛의 환희, 씹는 듯 마는 듯 입에 넣기 바쁘게 목구멍에서 빨아들였다.

 위장으로 밀어 넣었던 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우리는 먹는 동작을 멈추었다. 남는 것은 건초더미 깊숙이 숨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너무 불러 바로 눕지도 못하고, 개구리처럼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바깥이 수런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몽롱한 상태에서 부잣집 영감의 고함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빌어 묵을 XX들….

 사태를 감지한 나는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자는 체했다.

 엄마가 언니에게 둘을 깨워 나오라고 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니 동네 사람들로 마당이 꽉 찼다. 사색이 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오빠와 나를 향해 엄마가 물었다.

-너거가 감 따 먹었나?

 이미 얼음처럼 굳은 표정에서 결과는 뻔했다. 엄마가 영감에게 백배 사죄했지만, 영감은 평상에 걸터앉아 지난 몇 년 간 털린 감이며 기왓장 깨진 것, 그리고 정신적 손해 등에 대해 구절구절 읊으며 최종선고를 내리고 떠났다.

-나락을 베 주든가, 노동으로 갚으라!

 영감과 동네 사람들이 떠난 후 오빠와 나는 죽지 않을 만큼 맞고 먹었던 감을 다 토했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단감이 다시 나의 생 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우함으로써 내 평생 잊지 못 할 트라우마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고 그의 유학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양가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처지가 아니어서 남편의 학업을 내가 뒷바라지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따라갔다. 그러나 덜컥 계획에 없던 임신이 되었다. 준비한 유학자금을 통틀어 일 년을 겨우 살까 말까한 금액이었기에, 단돈 1달러 쓰는 것에도 가슴을 졸았다.


 입덧이 심했다. 느글느글한 뱃속부터 깔깔한 입안까지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족족 토하기에 바빴다. 종일 뭘 먹으면 속이 가라앉을지, 맛이 있을지, 기운이 날지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임신 7개월로 접어든 어느 날, 아침부터 구토가 나기 시작해 종일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침대에 누운 채 무슨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날까를 생각했다.

-아아! 그것 한 개만 먹으면….


 궁핍했던 시절 내 혀끝에 남아있던 그 맛, 단감이 먹고 싶었다. 그날부터 단감에 지배당한 입은 어떤 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남편이 단감구할 방법을 모색하는 듯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기적 들고 왔다. 집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동양마켓에 한국산 단감이 있다는 이었다.  


 벌써부터 입에 군침이 돌았다. 어릴 적 오빠랑 서리해서 먹었던 그 맛을 상상하자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며, 뱃속의 아이도 춤을 추었다.


 동양마켓에 가기로 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설레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뱃속 아이는 벌써부터 요동쳤다.

 

  자동차로 약 한 시간에 걸쳐서 도착한 동양마켓은 생각보다 소소했다. 약 25평 정도나 될까 말까, 넓지 않은 공간에 한국산 물건보다 다른 아시아 국가 상품들이 더 많이 진열돼 있었다. 유학생 많은 중국과 일본, 인도산들이 주를 이루었고 한국산은 라면과 국수만 눈에 띄었을 뿐 어디에도 감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주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한국산 단감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아아, 전화하신 분이군요. 잠시 기다리세요.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 자그마한 박스를 하나 들고 나왔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테이프를 벗기자, 비로소 귀하신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주여! 나무 관세음보살!


 그때까지 푸른빛이 완전히 사라진 잘 익은 단감은 보기만 했을 뿐 먹어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당한 수모에 치가 떨렸고, 사춘기가 되며 고통스러운 기억의 한 부분으로 자리했기에, 힘들 때마다 아버지 잃은 슬픔으로까지 비화되는 망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서도 의식적으로 피했는데, 험한 욕설을 해대던 영감에게 한마디 항변도 못한 채 이틀 꼬박 품삯으로 손해를 변상했던 엄마를 생각하면 보기조차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뱃속의 아이는 그런 나의 아픔이나 상처는 아랑곳없이 하고많은 과일 중에 단감을 원했다.

 감을 보는 순간, 뱃속이 파도를 일으켰다.


 남편이 박스 속 감 한 개를 집어 가격표를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2,99 라고 씌어 있었다.

-어엌? 하나에 3불짜리, 학교에서 점심으로 99센트 햄버거만 먹는데, 3일치 점심값과 맞 먹어!

 

남편은 감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더니 $2,99 가 또렷이 적힌 가격표를 내 쪽으로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그 자리서 당장 베어 먹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가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릴없이 넓지 않은 마트를 몇 바퀴 돌던 남편은 한국산 라면 5개와 조그만 병에 담긴 오징어 젓갈을 내게 보여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S라면과 젓갈이야!


 온몸의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현기증에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뱃속의 아이도 조용했다. 맛있는 것 주겠다며 며칠을 벼르고 한 시간을 달려왔으면서, 약속을 어긴 분노 때문이지 한쪽 끝에 딱딱하게 웅크려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한 시간을 달려 집으로 되돌아왔다.  


 단감은 내게 응어리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헤어나고픈 간절한 기원 같은 것이다.

     

2014년 11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