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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Jan 08. 2022

인생 이모작, 삼모작, 다모작

   


   2년 전 겨울이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마 떨이하세요! 고구마 떨이, 몇 개 남지 않았어요. 떨이, 떠리, 떠리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모자, 장갑, 마스크로 완전무장을 한 아저씨가 손을 비비며 ‘고구마 떨이’를 외치고 있었다. 그냥 서 있기조차 힘들만큼 살인적 추위에 아저씨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는 듯, 빨리 따뜻한 보금자리로 가고 싶어 하는 분위기들이 역력했다.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은 썰물처럼 줄쳐진 건널목 속으로 흡수되었다. 

 후줄근하고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안쓰럽게 여겨져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고구마 얼마예요?

-세 개 오천 원요.

-‘떨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몇 개나? 

-대략 열 개쯤 남았을 거예요. 

 지갑을 여니 돈이 달랑 삼천 원밖에 없었다. 

-어머낫! 돈이 얼마 없네요. 

-그냥 다 떨이해 가시고, 나중에 계좌로 넣어주세요.

-네에?

 그리고 보니 리어카 옆면에 계좌번호가 적힌 코팅된 종이가 부착돼있었다. 순간, 돼지 발톱에 메니큐어란 이미지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푸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웃으세요?  

 큰 소리로 웃는 나를 겸연쩍게 바라보는 아저씨를 의식하곤, 민망함에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입금을 하고 남은 고구마를 다 가지고 집으로 왔다. 아래층 가게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내 먹을 것 달랑 한 개만 들고 올라왔다. 

 고구마는 가히 꿀맛이었다.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괜히 다 없앴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날, 만나는 아래층 상가 사람들마다 고구마에 대한 인사를 해왔다. 너무 맛있었다며 어디서 샀는지를 물어왔다. 사거리 아저씨를 열렬히 홍보하고…, 출출하고 심심하면 사러 나갔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저씨가 건너편 사거리에 리어카를 끌고 등장했다. 

-아저씨 기다렸어요. 잘 지내셨죠?

-제가 이 동네를 사랑하는 이유 중, 사모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저씨, 설마 제 미모에 반해 전화번호 따려고, 작업 거시는 거라면 정중히 사양합니다. 저 예뻐봐서…, 그런 일 비일비재, 반사합니다. ㅋㅋㅋ

-사모님 같은 분이 저 같은 일개 군고구마 장수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단지 제가 근무했던 곳이 이 근처라 물어본 것뿐입니다. 

-일개고구마 장사라라니요, 그런 말씀은 많은 고구마 파는 분들에게도 잘못된 표현…, 근무지가 어디셨는데요?

-저기 건너편 ○○은행.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마스크를 벗었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을 때 상상하지 못했던, 깔끔하고 인텔리전트 한 얼굴이 드러났다. 안면이 있는 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아무튼 친근하고 편안한 인상이었다. 


 단골로 다니다보니 아저씨와 자연적으로 친해졌다. 아저씨는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뒤 식당업에 손을 대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큰 손해를 보고, 인생 삼모작으로 고구마 장사로 나섰다고 한다.

-아저씨, 응원합니다! 올해 60세인 제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 친구들 하나둘 퇴직하고, 아파트나 중소업체 경비라도 일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활기차고 행복해하는 반면, 일을 놓은 이들은 우울해 하더라고, 일이 있어야 건강도 행복도 유지되기 쉽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맞습니다. 이렇게라도 나오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아요. 특히 우리 사모님같은 분이 계셔서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제가 사모님을 잊지 못하는 것은 처음 고구마장사로 나섰을 때 떨이해가라는 외침에 가던 길 돌아와서 몽땅 사주셨던, 집에 가서 보니 더 많이 들어와 뭉클했습니다. 사실 연세 드신 분은 휴대폰 송금을 할 줄 모르고, 또 젊은 사람들 중에는 입금한다고 가져가서는 그냥 사라지는 일도 흔치 않아….     

 지난해(2021)봄, 우리 회사인 공장 주변으로 울타리 겸 풍경도 고려해 약 이백 그루의 묘목을 심었다. 남편에게 언제부터 나무를 심자고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기에 내가 직접 팔 걷어 부치며 나섰다. 묘목을 사러 같이 갔는데 자꾸 싼 종류들만 사겠다는 그와 비싼 것들을 챙기는 나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이구우 사장님, 사모님 말씀 들으세요. 땅이 있어 이렇게 나무를 수백그루씩이나 심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축복입니다. 이 좋은 일을 두고 왜 싸우십니까? 이런 일은 여자들의 감각이 좋고 조경감각도 훨씬 뛰어납니다. 이왕하시는 거 좋은 수목 심어놓으면 나중에 절대로 후회 하지 않습니다. 

 묘목 밭 주인의 훈훈한 나에 대한 칭찬에 남편은 뒷전으로 물러서며 최후통첩을 했다. 

-이 일은 전적으로 당신이 알아서 해. 내게 이런 저런 요구하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공장으로 돌아와서는 포클레인 하나만 불러주고 남편은 자기 일로 돌아갔다. 포클레인 기사가 구덩이를 파주면 나는 묘목을 그 안에 넣고 다시 기사가 흙을 메우는 것으로, 이틀 할 일을 하루 만에 끝내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리고 여름, 고등학생인 둘째가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 가족은 코로나로 뒤숭숭한 서울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회사 내 숙소에서 지내면서 학원 스케줄이 있는 주말에만 서울을 오가기로 했다. 

 회사를 주변을 돌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작년 봄에 심었던 나무들이 주변 잡초들에 둘러싸여 맥을 못 추고 있었던 것이다. 늦은 밤까지 포클레인 기사와 호흡 맞춰 생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주인 잘못 만나 제대로 성장을 못하는 자식들인 것만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공장 주변으로 커다란 호수가 있어선지 습지대에 서식하는 갈대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낫과 호미를 들고 주변 잡초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싹둑 잘려야 할 잡초들이 오히려 조롱하며 낫을 튕겨내는 듯했다. 작은 농기구로 될 일이 아니었다. 

 차를 몰고 시장으로 나가 삽, 괭이, 곡괭이까지 사들고 와서 잡초들과 씨름을 했다. 뿌리들이 얼마나 땅속에 깊이 내렸는지 도무지 내 힘으로 감당이 안됐다. 농기구들을 팽개치고 남편에게로 갔다. 

-여보, 내일 직원 한사람 내게 좀 붙여주면 안될까? 힘에 부치네.

-이 사람이? 직원들이 노는 줄 아나봐? 각자 자기 역할이 있어. 게다가 업무외적인 일 부탁하면 직장 갑질로 고발당해. 

-그러면 인력 사무소에 연락해 힘 좋은 사람으로 이삼일만 불러줘. 부탁이야.     

 다음날, 늙수그레한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인력사무소에서 온 사람 같았다. 당장 사무실로 달려가 남편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젊고 힘쓰는 사람 불러 달랬더니, 노인을 부르면 어떻게 해? 

-일단 해봐. 이런 일 좋아한다고 자청하셨대.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 맥 빠진 걸음으로 노인 앞에 다시 왔다. 

-아저씨, 오늘 할 일이 이 잡초들 제거하는 거거든요. 혼자 며칠 했는데 잡초가 저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어찌나 힘이 세든지, 흐흐흐흐….

 나는 내심 지레 겁먹고 노인이 가 버리기를 바라며 힘듦을 과장했다. 

-이런 일은 힘도 중요하지만 경험도 중요합니다. 이런 일 좋아하고 많이 해봤습니다. 제가 선 작업 할 테니 사모님은 저 뒤따라 하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노인은 사람 키를 훌쩍 넘은 억새를 낫으로 베기 시작했다. 몇 미터를 그렇게 한 후 다시 돌아와 베어놓은 자리를 괭이로 파헤쳤다. 나보고는 괭이질한 곳 뿌리를 뽑아 올리라고 했다. 

 일은 척척 진행되었다. 별로 힘들이는 것 같지 않으면서 쉽게 일을 해 나가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농사를 지어온 사람이라면 이런 데 잡부로 다니느니 자신의 일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고, 직장 생활을 했다면 이런 일을 저렇듯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일에 손을 대는 것도 어린 시절 지겹도록 논밭 일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저씨 뭐 하시던 분인데, 이렇게 일을 잘하세요? 

-허허허허…, 뭐한 사람 같습니까?

-그러게요. 제가 사람을 잘 보는 편인데 전혀 모르겠어요. 

 내 질문에 웃음만 띈 채 답을 주지 않았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려니, 어떤 연유로든지 인력사무실에 이름을 얹어놓고 다니는 걸보면…, 저분에게도 한때 찬란했던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그분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일이 사흘이나 계속되는 동안 나는 자연스레 아저씨와 살아온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말씀하시는 본새와 행동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더니, 몇 년 전 교감으로 정년퇴직을 했노라했다. 

-사실 인생 후반은 텃밭 일구며 살려고 조그만 땅뙈기도 사놨는데, 손자들이 하나둘 태어나며 아내가 그 애들 봐주느라 시골로 가는 것이 물거품이 됐어요. 멍하니 집에 놀기 뭣해 인력사무소에 이름을 얹어놓았지요.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아무 쓸모없는 늙은이가 된 것 같아 여간 서글프지 않았어요. 이렇게 일하다보면 밥맛도 좋고 잠도 잘 오고…, 무엇보다 살아있음이 느껴져 행복합니다. 힘든 일은 못하고, 소소한 일 있으면 저를 불러 달라고 부탁해 놓았답니다. 

 빡세게 하면 사흘이면 될 일을 닷새로 늘려가며 전직 교감선생님과의 노동을 즐겼다. 보통 공장에서 일당 작업자를 부르면 기술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막노동은 주로 13만 원인 선인데 아저씨는 스스로 당신의 몸값을 낮췄다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닷새 후 남편에게 아저씨 근로비를 받은 뒤 내 돈 10만 원을 얹어 살며시 손에 쥐어드렸다. 

-아저씨, 내년에 다시 와 주실 거죠?

-불러주신다면야 다른 모든 일 제치고, 일 순위로 오겠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엄마, 풀 베던 할아버지가 나에게 십만 원 주셨어.

-뭐어?      

 먹먹해져 오는 가슴으로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어쩌자고 얼마 되지 그 돈을 제 아들에게 주셨어요? 노동에 비해 현저히 낮은 금액이었는데요. 

-좋은 분들과 일 할 수 있어서…, 닷새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잡초들이 무럭무럭 자라, 내년에도 일거리를 제공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하하하….     

 *이 시대의 이모작 삼모작, 다모작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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