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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Jan 08. 2022

다시 짝이 되어

   

                           


-인숙아! 요즘 뭐하고 지내니?

-그냥 저냥, 푹 쉬고 있다. 

-나랑 같이 문화센터 글쓰기 반에 다니지 않을래?

-야! 너는 이미 작가고, 나는 글쓰기라곤 아이들 생활기록부만 겨우 쓰다 나온 사람인데 무슨 공부를 같이 한다고 그래?

-학교 다닐 땐 니가 나보다 공부를 잘해 늘 너의 받침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젠 니가 내 받침 좀 되어주면 안되겠니?

-호호호호…, 너의 받침이 돼 달라…, 그런 이유라면야 한 번 생각해 볼게.     

 42년 전, 진주여고 1학년 7반, 청운의 꿈을 안고 서부경남 제일의 명문인 진주여고에 입학했다. 내 짝꿍은 나처럼 키가 자그마하고, 얼굴이 예쁘장하고 마음이 착해보였다. 

-어디서 왔어?

-나는 하동에서, 너는?

-응, 나는 합천….


 인숙이는 차분한 성격으로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공부보다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한마디로 고학생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슈퍼마켓을 하는 먼 친척집에 얹혀살았는데 하교 후에는 슈퍼마켓 일을 도우며 근근이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등록금을 제때 낸 적이 없어 늘 교무실로 불러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춘기 감성에 그런 일들은 나를 한없는 방황으로 이끌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성적이 뒤로 밀리다보니 자연히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늘 외톨이었던 내 곁에 인숙이만 있었다. 수업시간 옆에서 졸고 있는 나를 쿡 찌르며 공부하라고 상기시켜주기도 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졸업은 하였다. 인숙이는 서울에 있는 교육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나는 대기업 대구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며 점차 직장생활에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고시절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니 아는 친구도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알고 지내던 인숙이와도 교류를 끊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매년 창립 기념일마다 그룹 내 글짓기 대회를 열었다. 입사 3년째 되던 해 내가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상금도 당시로서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큰 거액이었다. 시상식은 서울 본사에서 이루어졌다. 각 시도에 흩어져 있는 입상자들은 회사가 제공해 주는 교통편으로 올라와 회사가 지정해 주는 호텔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시상식에 참여하도록 했다. 서울에 살거나 서울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당일 시상식에 참석만 하면 되었기에 회사가 제공해 준 숙소에 자는 것이 의무사항은 아니었다. 


 나는 일단 인숙이를 만나고 싶었다. 여고시절 내내 그녀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아 받은 상금으로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비록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내가 직장에서 이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그녀에게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인숙이를 만난 곳은 그녀의 학교 앞 서울교대 근처였던 것 같다. 당시 서울 교육대학은 4년제로 그녀는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는 정말 반가워하며 나를 데리고 서울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주었다. 온 종일 서울 시내를 쏘다니다 나는 회사가 정해준 호텔로 가지 않고 인숙이가 살고 있는 그녀 언니 집으로 갔다. 인숙이 언니 또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인숙이 언니가 생일상처럼 거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시상식을 마치고 나는 곧바로 대구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상금의 일부로 인숙에게 선물하려던 마음을 접고서 말이다. 버스 안에서 꺼억, 꺼억 소리 내며 울었다. 대학생이 된 그녀가 너무나 부러웠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에 결혼을 하고 서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내 수준에 다소 버거운 상대와 결혼함으로써 그 남자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다. 남자가 결혼 조건으로 내건 것은 다음과 같았다.

1.시부모님께 무조건 복종, 공경할 것.

2.시동생들 잘 돌볼 것,

3.유학비용 모으는데 동참 할 것.

4.계약 불이행시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수용할 것 등이었다.     

 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뛰어다니며 일을 하고 살림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회사생활만 하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식당이나 파출부 등의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나갔다. 남편은 자기가 번 돈은 오로지 유학비용으로 저축을 해야 한다며 내가 번 돈으로 생활비를 하라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혼 생활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 이를 악다물고 버텼다.  

    

 몸이 아파 며칠 쉬었더니 당장 생활비가 부족했다. 자존심이 상해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몇날 며칠 고민하다 정인숙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서울 시내 어느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돈 좀 빌려달라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자리서 자신의 월급 반이나 되는 돈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은 뒤 다시 연락을 끊고 지내다 슬그머니 남편 유학길에 도망치듯 따라가 버렸다.      

 유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내가 뒷바라지 하지 않으면 남편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갓 낳은 아들을 부모님께 맡기기 위해 잠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때가 농사철이라 시가에서 바쁜 일손을 거들고,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나는 젖먹이 아들을 떼어놓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 서울로 왔다. 시동생들이 기거하는 집에 하룻밤 묵고 내일 출발할 예정이었다. 


 핏덩이 아들을 떼어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아들을 맡긴 시가에서도, 친정 가족들 앞에서도 울지 못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명치에 걸려 숨이 안 쉬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붙잡고 시원하게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고 싶었다. 

 인숙이를 만나고 싶었지만 빌린 돈이 내 목을 잡았다. 수도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밤이 이슥해서야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인숙아, 내가 이러저러해서 한국에 왔는데, 내일 김포공항까지 나를 좀 태워 줄 수 있겠니?

-가서나! 와 은자 연락하노?    

  

 인숙이 근무를 마치고 나를 실으러 왔다. 출발 비행기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공항으로 가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하얗다. 빌린 돈에 대한 것은 입 밖에 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대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정갈하게 포장한 박스를 내밀었다. 

 미국에 도착한 나는 인숙이가 준 상자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 속에는 김, 미역, 고추장 등이 들어있었다. 



 돌고 돌아 그녀와 한 강의실에 앉아있다. 강의 중간 중간 그녀에게 말을 거니 나를 쿡 찌른다.

-교수님 말씀하시는데, 나중에 이야기 하자!

 시간의 줌을 당겨 42년 전, 진주여고 1학년 7반 교실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그녀를 쿠폰처럼 사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숙아, 이제 나를 쿠폰처럼 사용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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