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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Oct 03. 2023

배꼽 먼저 맞춘 사이

머리끄덩이 잡힌 날

사진 출처: 임영미



 모교 출신 문인들로 구성된 동문들이 ≪일신문학≫이라는 잡지를 매년 발간하고 있다. 종이책, 사이버공간 할 것 없이 넘쳐나는 읽을거리들로 이미 활자 공해인 시대를 살고 있지만, 피가 당기는(?) 단체에서 발간되는 활자들은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는 편이다. 현재의 나를 받치고 있는 뿌리의 맥을 되짚어가는 일처럼 뜻 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느 동문의 시(詩) 앞에서, 어머니 탯줄에서 비롯된 원초적 인연의 시원에 도달한 느낌이 전해져, 잠시 책을 덮고 먼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나는 본처, 너는 시앗?/ 보이기만 하면 머리끄덩이 잡듯이 왜 이렇게 뽑고 싶은지/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디밀며 나를 성가시게 하는,/ 아무리 같이 살자 해도 도무지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마당을 다 차지하고 날마다 생글거리는 너와 나,/ 그 인연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윤덕점 '잡초와 호미 사이'                                                   

   

 ‘머리끄덩이 잡듯이’ 란 구절이 뇌의 전두엽에 접선되는 순간 쩌릿하게 생성되는 전류가 목과 가슴을 타고 흐르며 어느 종착지점과 맞닿았다.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나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이해한 것은, 머리에서 배꼽까지 이어진 직항로 노선에 특별한 서사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머리끄덩이 잡힌 적이 몇 번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내 인생을 바꾼,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어난 사건이다.

 방과 후 청소시간이었다. 청소당번은 남학생 5명, 여학생 5명이었다. 2인용 책상에 의자 두 개를 거꾸로 엎어 두 사람이 함께 들어 앞뒤로 옮겨가며 쓸고 닦아야 했다. 유교적 남존여비 및 남아 선호사상이 만연했던 시기이고, 지역도 아주 보수적인 곳이어서 남자들은 쉽고 간편한 일을, 여자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걸 아주 당연시 여겼다. 빗자루로 설렁설렁 쓸기만 하면 되는 일은 남학생이, 화장실에서 키보다 높은 밀대를 빨아 닦는 힘든 역할은 여학생들 차지였다.  


 책걸상을 몽땅 들어 뒤로 옮겨놓은 뒤, 나를 비롯한 여학생 당번들이 화장실에서 밀대를 빨고 돌아오니 남학생들이 아직 교실바닥을 쓸지 않은 채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다.

-너거들 청소 안할끼가? 선생님한테 일러줄 거다.

 남학생들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여학생들 말을 무시하고 장난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부반장인 나에게 게으름 피우는 학생들은 칠판에 이름을 적어놓으라고 했다. 선생님의 지시를 받는 게 큰 권력(!)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터라 나는 사명감을 갖고 남학생들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청소하지 않는 학생>

1.○○○

2.○○○

3.띠또


 뚱뚱해서 ‘띠또’란 별명을 가진 남학생이 내게 다가와 항의했다.

-왜 나만 별명 적어?

-띠또 맞잖아.

 씩씩대던 그가 나를 밀치며 발로 둘러찼다.

-니 지금 내 때맀나?


 당시 시골에서는 몸으로 싸우는 일이 흔했다. 주로 동성끼리 싸우거나, 남학생이 여학생을 때리는 일이 예사였지 동급생 여학생이 남학생을 때리는 일은 드물었다.

 연년생 오빠와 자주 싸웠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내 편에서 오빠를 나무랐기에, 누구와 무슨 일로 싸워도 내가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덩치 큰 오빠도 이겨먹는데 하물며 동급생 남학생임에랴. 게다가 띠또는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이었다.


 언뜻 봐도 내가 이길 것 같아 이 악 다물고 그에게 돌진했다. 때리고, 맞고, 맞고, 때리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 둘이 엉겨 붙었다. 옆 반들에서 친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싸움을 부추겼다.

 “띠또 이겨라, 수화 이겨라….”

 휑하니 빈 공간이 ‘청도 소 싸움터’처럼 변했다. 엎치락뒤치락 하던 중, 그가 내 배 아래로 깔리며 코피를 흘렸다. 그 세계에선 코피가 나면 무조건 지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었다.

 수많은 관중들이 띠또의 패배와 나의 승리를 공식화하며 그 게임은 끝났다.     

 

 띠또가 여학생에게 졌다는 소문이 온 학교에 돌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놀림이 견딜 수 없었을까? 어느 쉬는 시간, 의자에 앉아 있는데 정수리에 강한 타격이 일며 머리털이 뽑히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엄마가 곱게 땋아준 머리채를 누군가 힘껏 잡아당기는 듯했다. 잡힌  채 고개를 아래로 비틀고 올려다보니 ‘띠또’였다.

 무소의 뿔처럼 그 상태로 띠또를 밀어붙였다. 책상과 의자를 넘어뜨리며 그를 교단 앞까지 밀어 붙였다. 그가 내 배 위에 올라탄 채 나를 때렸다. 그에게 눌린 상태지만 나도 힘껏 발버둥 치며 그를 마구 때렸다.


 초반에 힘을 너무 많이 빼앗긴 탓일까, 아무래도 남학생의 기운을 이길 수 없다 판단한 나는 어떤 타이밍에 울어야 덜 부끄러울지 계산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어, 띠또 코피난다!

 아이들의 외침에 그가 갑자기 전의를 상실한 듯 내 배위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소매로 스윽 닦은 피를 보고는 하마같이 큰 입을 벌리고 교실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어김없이 그는 울었고, 여지없이 나는 승리했다.


 그 후 그는 나를 피했고 나도 더 이상 그의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     

 

 띠또와 나는 같은 초ㆍ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J여고, 그는 기숙사가 있는 B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띠또가 기숙사 한 방을 쓰게 된 친구 K에게 나를 소개했는데, K가 훗날 내 남편이 되었다.   

  


 오래전, B고등학교 동창회를 다녀온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가 당신에게 안부전해 달래.

-다른 말 뭐 없었어?

-나보다 자기가 당신과 배꼽 먼저 맞춘 사이라던데?

-그리고?

-어렸을 때 성질이 독사보다 더 독했대!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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