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 이야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운은 그냥 오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부르는 것일까. 길을 걷다 마주치는 우연처럼 오는 것일까? 아니면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기회일까? 그 물음은 단순하지만 철학적이다.
그리고 꽤 오래된 질문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타이케(Tyche)’라는 여신을 믿었다. 눈을 가린 그녀는 복불복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운’은 늘 예측할 수 없는 힘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철학이 그렇게 수동적이진 않았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운이란,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는 행운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맞이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보았다.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만 기회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냥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따라서 운이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부르느냐’는 점이다. 운을 부르는 사람들은 일정한 특징이 있다. 그들은 먼저 ‘움직인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장소로 떠나며, 익숙하지 않은 선택을 감행한다. 이러한 행동은 우연을 증가시킨다. 통계적으로도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다. 한자리에 머무르는 이에게 행운은 잘 오지 않는다. 움직이는 자에게만 행운은 접촉할 기회를 얻는다.
행운은 확률의 문제이기도 하다. 행운을 부르는 또 하나의 방식은 ‘태도’다. 낙천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불운 속에서도 기회를 본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힘, 그것이 운의 기초를 바꾼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프레이밍’이라 부른다. 불안 속에서도 배움을 찾고, 실패 속에서도 성장을 발견하는 사람. 이들은 외부 운보다 내부 태도를 신뢰한다. 결국 행운이란, 상황이 아니라 해석의 기술이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운을 만든다. 또한 운은 ‘관계’에서 오기도 한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기회를 얻는다. 누군가의 한마디, 소개, 추천, 제안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이것은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종류의 운이다. 그래서 ‘관계 운’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우연은 아니다. 좋은 관계는 스스로 만든다. 다정함과 진심이 결국 운을 부르는 씨앗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 좋은 사람’은 사실 여러 복합적 요소를 갖고 있다.
기회가 있는 곳에 자주 가고,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연결을 지속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시도한다. 즉, 운을 만들기 위한 환경을 스스로 구축한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운이 좋다’고 불릴 뿐, 실제로는 철저한 실행자이자 전략가다. 운을 의심하기보다, 운을 설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운이 올 수 있는 자리에 자주 있어야 한다. 강연장, 전시회, 낯선 카페, 여행지 등, 새로운 가능성이 숨겨진 장소를 자주 찾아야 한다.
둘째, 작은 시도들을 꾸준히 해야 한다. 글 한 줄, 사진 한 장, 아이디어 하나도 언젠가 큰 기회를 불러올 수 있다.
셋째, 만남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기회는 사람을 통해 온다. 그 연결이 곧 운의 입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을 만났을 때 그것을 알아보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행운이 평범한 옷을 입고 온다. 힘들어 보이는 일이 기회의 문일 수도 있고, 작아 보이는 시작이 큰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운은 늘 크고 눈부신 모습으로 오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준비된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본다. 감각은 훈련된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자신의 직관을 신뢰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행운은 ‘오는가? 부르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삶에 관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운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내가 만든 힘’이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우연이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당연한 결과다. 행운은 아무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인생의 축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운을 부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