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3. 이반 이리치의 죽음, 죽음의 수용소에서

상반된 두 책의 독후감

by 강울이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을 방문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아내가 남편을 잃은 부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토로하는 모습, 직장 동료들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이 1장에서 나온다. 그 후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성인이 된 이반 일리치의 딸과 중학생인 아들을 지나 망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추도식이 진행된다. 그는 약간의 역함을 느낀다. 추도식이 마치고 그는 빠르게 장례식을 빠 져나왔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자리를 떴고, 장례식을 나왔다. 그 순간 신선한 공기가 너무 상쾌했고 묘한 쾌감을 느끼느 표트르 이바노비치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장례식을 나온 즉시 다른 직장 동료들이 내기 게임을 하고 있는 곳으로 떠나며 1장이 마무리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뭔가 씁 쓸함이 느껴지는 대목인 것 같았다. 나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 일수도 있지 않은가.


2장과 3장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가정 환경 및 인생을 이야기한다. 공무원의 아들이자 셋 째 중 둘째. 특출 날 것이 없는 부모님들. 보잘 것 없는 형제들. 부족하다면 부족한, 평범 하다면 평범한 환경에서 이반 일리치는 1장에서 나온 씁쓸한 죽음과는 달리 나름 성공한 케이스의 삶을 살았다. 판사로서 사회 고위계층과도 어울렸고, 파티에서 고귀한 분들과 만남을 가지는 등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기준에 충족한 삶을 완성했다. 그러다 파티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행복할 줄만 알았던 결혼 생활은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달라졌다. 아이들도 유산하는 등 총 셋의 아이를 잃었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더더욱 나를 귀찮게 하였다. 아내에게 불만을 느낄수록 더더욱 업무라는 세상에 빠져만 갔다. 업무만 이 지독한 결혼 생활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업무에서도 어느 날부터 승 진에 차질이 생겼다. 그러자 제쳐 두었던 아내의 못난 모습이 다시금 보이기 시작한다. 사치부리는 행동들, 떨어지는 품격, 부족한 봉급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고위직과의 친분으로 발품을 팔아 시골 지역에서 고위직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그 시골에서 업무를 잘 하면서, 자존심의 회복, 허영심의 기쁨을 되찾는데 성공했 다. 고위직과의 파티도 다시금, 자주 진행할 수 있었다.


4장에 들어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건강이 나빠지자 되찾은 가뿐함과 유쾌함이 사라졌다. 소란이 잦아졌다. 아내의 사소한 행동 말투 하나하나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허영심에 미치지 못하는 언행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막 대하는 행동은 아내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고 그 서운함은 다시 이반 일리치에게 돌아오는 악순환이 생겼다. 이 모든 이유의 시작은 건강의 부재였다. 검진 결과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 와 중에 외출을 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이 밉기만 하다. 업무에도 차질이 생기며 매일 매일 이 고통이었다.


5장 공포, 6장 절망. 낯빛이 많이 어두워졌고, 죽은 사람의 눈이 되었다. 공포가 엄습해 온다. 하지만 약을 제시간에 먹고, 건강에 해로운 것을 하지 않으면 나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희망해본다. 하지만 다시 아파온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시간이 지난다. 죽어감이 느껴진다. 이 고통이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서서히 절망에 빠져간다. 내가 죽음을 보듯이 죽음 또한 나를 보고 있는듯 하다.


7장, 8장 주변 관계로부터 오는 고통 그리고 민폐.


이반 일리치가 언제 자리를 비켜줄지, 언제 나갈지 등을 주변 사람들이 신경쓰기 시작 했다. 자신이 주변에 민폐가 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잠도 점점 줄었다. 아편을 쓰고 모르핀을 투약하기 시작했다. 맛 없는 건강식을 먹었고 특수 용변기를 사용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라심이란 일 잘하는 하인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부탁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다 들어준다. 사소한 것부터 필수적인 것까지.. 그의 도움이 없다면 하루의 고통이 더 커다랬을 것이다. 그는 게라심을 계속 찾았고, 관심을 바라는 것이 하루의 낙이 되었다.


요즘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고통이 아니다. 바로 거짓이다. 왠지 모두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듯 하다. 내가 민폐가 아니란 말부터, 살 수 있을 것이란 말까지. 모두 거짓같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 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게라심만이 이해하고 부탁을 들어준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아픈 어린아이 대해주듯이 대해 주길 바랬다. 나를 생명력이 충만한 사람으로 대해 줬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딸이 약혼자를 데려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시작은 품위 있고 격식 있는 대화로 이 어졌다. 하지만 내가 없는 미래를 이야기 하는 상황이,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들 끼리의 대화에 어느 순간 화가나 나도 모르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실상이, 점잖은 거짓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결국 작별을 고했고 만남이 끝났다.


9장 우울.


가족들이 외출을 했을 때, 나는 한순간 눈물을 펑펑 흘렸다. 하느님의 부재와 잔혹함에 목 놓아 울었다. 이젠 과거 인생의 유쾌한 최고의 순간들이 더이상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았다. 차라리 어릴 때의 추억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그 외엔 다 하찮게 느껴졌다. 삶 의 터무니 없음과 가식적임, 그리고 역겨움. 왜 죽어야 하며 왜 죽어 가면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혹시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인 것일까? 스스로 재판을 해보기도 한다. 나 는 무죄다! 속으로 외쳐본다.



10장 수긍.


더 이상 소파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침대가 싫다. 해방될 수 없는 끔찍한 죽음만이 점점 현실적이게 다가온다. 완전한 고독. 유년시절의 상상으로 그 고독을 버텼다. 어릴 때, 생명력이 넘칠 때를 생각하며. 죽음에 가까워 질수록 어두워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자신의 잘못이 있기에 이것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반 일리치 의 얼굴에 남이 보면 마치 웃는 것 같다는 표정이 지어져 있다. 도대체 왜..?


11장 죽음의 인식.


상태가 더욱 나빠진다. 어쩌면 자신이 삶을 잘못 살지 않았다는 믿음에 금이 가고, 내가 잘못 산것이 맞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삶의 기준, 활동 했던 사교계 와 직장 내부 관계들, 모든 것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 있었다. 완전히 새로이 인생을 되짚어 본 결과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삶과 죽음을 뒤덮은 끔찍하고 거대한 기만임을. 아내가 옆에 와 속삭인다. 성찬을 받으라고. 사재가 찾아왔고 고해성사를 통해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통이 완화 되었고, 희망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눈물을 글썽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희망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증오가, 증오와 더불어 나를 기만하는 것이 찾아온다. 그렇게 고통이 얼마 안가 또 찾아왔다.


12장 해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구원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발버둥친다. 내가 죽기 한 시간 전 일이다. 아들이 찾아와 손을 잡는다. 아내가 찾아와 내 볼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나는 내 가족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내가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죽음으로 그들을 구원하고, 나도 이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의 공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죽음이 이젠 없었기에 어떠한 공포도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다음에는 부글거리는 소리도, 헐떡이는 소리도 점점 희박해 졌다. 끝났다. 드디어 죽음이 끝났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없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든 생각이 있다. 이것이 내 미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4장까지는 이반 일리치라는 제 3자의 인생을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점점 스며들었고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 자신이 되어있음을 느꼈다. 그런 나의 감정을 위와 같이 책 내용을 서술하며 표현해 보았다. 세세한 묘사와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복기해보며 표현해보려 하였다. 내 표현 방식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러한 서술 방식은 자신을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하고, 죽음을 실제로 느낄 수 있 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이반 일리치가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이성적으로 구분해 나가며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이 흘러가는 대로 이끌리며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마치 죽음처럼.

죽음의 과정을 함께하며 느낀 단 하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 역시 그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다.”


지금은 취업, 겉치레(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쓰는 행위), 부모님과의 사소한 다툼 등 등의 일들이 되게 큰 일이고 중요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 느꼈다. 그 모든 것이 인생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죽음이 다가오자 오히려 이반 일리치가 떠올린 생각들은 더 어릴 때의 생각이었다. 허영심이나 화려했던 삶의 전성기가 생각나는 것이 아닌 그저 생명력이 풍만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생명력이 떨어지고, 몸이 말을 듣지 않자 이반 일리치는 간병인인 게르심에게 더욱 어린아이 같이 행동했다. 관심을 받기 위해 사소한 것도 계속 요구하며, 마치 부모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자신을 죽어가는 사람이 아닌 그저 무감각하게 평범하 게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실 게르심 입장에서 보면 이반 일리치는 항상 보는 중환자였을 것이고, 그래서 죽음에 무감각해진 사람일 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는 게르심을 보며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죽음이 멀어진 듯한 느낌을. 그렇게 생명력이 충만했던 어린아이로 돌아갔던 것 아닐까. 그렇게 이반 일리치는 서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순간에 빛을 보았다. 뭔가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해방감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묘사하기엔 오묘한 감정이 많이 드는 것 같다.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기분일까? 꼭 해야 하는 숙제를 해치운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었을까? 정답은 없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내가 삶을 살아가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미래에 느끼게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느껴본다.


2.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책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술된다. 이반 일리치는 소설로서 가상인물의 감정과 죽음까지의 여정을 감정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은 실제 경험했던 바를 바탕으로 죽음과 가까웠던 과거를 이성적으로 표현한 다. 두 책의 성격이 완전히 대비되는 것 같았다.


이 책은 평범한 수용자들의 삶을 다룬다. ‘카포’라고 수용자들 중에 반장 같은 역할을 맡 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들은 수용자들 중에서 권력을 가진 자로서 좋아하는 친구를 살리 는 것에 권력을 사용하기도, 다른 사람을 때리고 속박하기 위한 도구로서 권력을 이용하 기도 한다. 주인공은 이 카포와 친해지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하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사임을 활용하여 간부들을 상담해주기도 하며 최대한의 능력을 활용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어린아이부터 여자들까지의 죽음도 보았 다. 가스실에서 90퍼센트 정도의 사람이 죽는 것을, 부족한 식량에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었고,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겪었다.


다양한 사람도 목격했다. 남들의 음식을 훔치는 사람, 시신의 신발을 챙기는 사람, 다른 사람을 때려 이득을 얻어 내는 사람들. 정신 착란에 헛것을 보는 사람, 그 와중에 기도를 하려는 사람, 가스실에 가기 전 자신의 식량을 나눠 주는 사람들도 보았다.


수감자들은 전부 번호로만 취급 되었다. 한 사람으로 대해지는 것이 아닌 그저 도구처럼. 이동하는 날이 있을 때면 가스실로 운반되는지, 다른 작업장으로 운송 되는지 항상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작업중에 조금의 여유가 남는다면 간부 몰래 잡담을 하기도 한다. 그 대화 내용 주제는 모두 먹는 것에 관련된 이야기다. 삶과 죽음, 먹는 것에 온 초점이 쓰여지는 삶. 아주 원초적인 단계로 퇴보한 생활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정세가 바껴 나치군이 아닌 적십자 대표가 수용소에 오기도 하였다. 작은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그 희망들은 대부분 헛되게 되기 일수였다. 그렇게 점점 피 폐해짐을 버티고 견뎌 드디어 진정으로 자유를 얻게 되기도 하였다.


이 책에선 수용소 생활을 표현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는 형식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단 주변 사람들의 정신 상태나 일어나는 일들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자유를 찾고, 편해진 상태에서 서술한 책이라 그런가 싶었다.


이반 일리치는 소설로서 허구의 인물이 감정적으로 토로하는 글이고, 죽음의 수용소는 경험담으로서 실제 과거 인물이 이성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 모순되는 점에서 더더욱 죽음이란 존재가 잘 표현되는 것 같았다. 허구적 존재로서 감정적인 죽음을 보았고, 실제 인물을 통해서 죽음의 이성적인 측면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 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 하는 것의 결정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수감자 생활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 조차 없다.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신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기회가 있었고, 도전할 것이 있었다 말한다. 그런 경험을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것이냐, 그와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느냐 그것 또한 각자의 선택이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사람은 무너진다. 그렇게 성탄절과 새해가 되고 희망을 잃은 수감자들이 많이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절망적이고 죽음에 가까웠던 삶이지 않았나 이 대목을 통해 느꼈던 것 같다.


글쓴이는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 인생의 의미를 찾는 그 자체의 노력이 인간의 원초적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이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가 좌절 당하는 상태. 그것을 이 로고테라피 관련 개념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말한다. 이 실존적 좌절은 실존적 공허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실존적 공허는 두가지 손실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본능이 사라지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전통이 사라졌을 때이다. 이런 실존적 공허를 느끼는 사람은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삶, 남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사람에게 활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바로 실존적 공허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메타인지이다. 이 책에서는 사회적으로 감춰진 초의미를 찾아라고 하는데 내가 느끼기에 그 모든 것들이 메타인지로 엮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즉,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특수한 방법으로 현재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그 의미를 찾아 책임감 있게 자신의 공허를 채우면 삶의 동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글쓴이가 수용소에서 살아갈 동력은 사랑, 희망, 미래, 끊임 없는 도전 그 모든 것을 활용해 악착같이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행동들이었던 것 같다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교수님 덕분에 읽게 되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자신이 이번 학기 자주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번 학기에 총 2번 정도 수업에 빠졌다. 날씨가 너무 좋아 바깥에서 여유를 즐겼던 것 같다.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한번도 빠짐없이 출석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2번 정도의 결석은 나에게 매우 큰 실패였다. 나는 손을 들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다른 손든 사람들을 보았다. 누구는 나보다 더 많이 빠졌지만 손을 들지 않은 사람도 보였고, 교수님이 그 말을 하시는 순간에도 출석하지 않아 손을 들지 못한 사람도 몇몇 떠올랐다. 교수님께서 이 책을 수업에 자주 빠진 사람들에게 추천한 이유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 학생으로서 아침에 일어나는 동일한 환경에 처해있다. 누구나에게 아침에 고통이 찾아와 속삭인다. 이 수업을 안가면 편할 것이라고. 안가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같은 고통이 찾아오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누구는 한 학기에 어떤 수업에도 결석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누군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마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환경 속에서 나쁜 행동을 하는 수감자, 착한 선행을 하는 수감자를 보는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나쁜 행동을 하는 수감자이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교수님께서 수업에 자주 빠진 사람이 손을 들라고 하셨을 때 손을 들고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손을 드는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 나는 그 선택에 정말 잘했다 말해주고 싶다. 부끄러움을 알았고, 책을 읽으며 과거를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을 반성하고 태도를 고치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된 것 아닐까.


사람이 공짜로 얻은 것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래서 자그마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그 대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태도에 따라 고통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한 깨달음도 그냥 책을 읽는 것보다, 수업에 빠졌고 그 과정에서 부끄러운 상황에서 고통을 얻고, 그 대가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 그저 책을 읽고 이해한 것과는 소중함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런 우연찮은 기회를 얻은 것은 마치 운명 같기도 하고 기연 같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 이 두 책에는 분명 깨달을 점이 많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과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듯 하다.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더욱 중요한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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