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2. 장자와 나

성장 일지

by 강울이

책을 읽기 전 내가 아는 ‘장자’는 기원전 300년 전 사람을 의미했다. 노자, 장자, 공자 중 한


명에 불과한 그저 그런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아는 ‘장자’는 매우 방대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표현하는 방식의 재미, 과거의 인물을 가져와 상징적 존재로 사용하며 유쾌하게 풀어내는 특유의 화법, 규칙 규제 관례 형식에서 벗어난 사고방식 등. 이제는 ‘장자’라는 한 단어를 보았을 때, 여러 생각과 기억들이 떠오른다. 단어를 받아들일 때, 나의 생각과 기억 등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에 나의 지식, 기억, 편견 등이 반영된다. 방대한 지식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거름망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상을 부분적으로 라도 받아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거름 틀, 그것을 우리는 가치관이라 부른다.


나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선 가치관을 재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더 넓게 더 크게 생각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분류하고 세부적으로 살펴봐야한다. 내가 영향 을 받은 존재는 누구인지, 나의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등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과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으며 인정받는 것에 행복을 느껴 공부도 열심히 하 였다. 맞벌이이신 부모님은 자식들이 걱정되어 학교가 마치면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였다. 피아노, 태권도, 수학, 영어. 오후 5시가 되기 전까지는 항상 학교나 학원에 있었다. pc방, 방과 후 친구 집 놀러가기 등을 초등학교 때 해본적이 없다. 부모님을 실망시키기 싫어 꾸준히 학원을 다녔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 정해진 생각들을 하며 살았다. 학교에서 장래희망 조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받자마자 적은 것은 항상 의사 또는 과학자였다. 수학 과학을 잘한다며 칭찬해 주셨고, 내가 의사, 과학자가 될 거라는 말에 행복해 하시는 부모님 이셨다. 형의 꿈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학교에 갔을 때, 나와 두 살 차이 나는 형은 졸업 학년이 되었다. 그해 형은 영재학교에 붙었고, 그때부터 나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영재학교가 되었다. 영재학교라 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서 그때의 나는 작은 의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행복했다. 오직 한 곳 만을 바라보았고 노력했다. 결국 나는 영재학교에 입학하였고, 나와 더욱 비슷한 학생들을 만나며 함께 공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내 마음속에 자그마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 다. 나는 공부를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형과 같은 대학교를 지향하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공부가 하기 싫어 졌다. 나의 생각, 목표, 행동 등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고작 나 자신을 망치는 행위였다. 이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따로 있다는 사실 또한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철학 공부를 하며 처음으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그마한 의심으로 큰 벽을 마주했고, 그 벽을 깨기 위해 주변의 것 들로부터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과거의 나와 달라져 있었고, 그 큰 벽을 드디어 넘었구나 싶었다. 이는 마치 성장을 위해 허물을 깨고 나오는 곤충과 같았다. 우리가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치관을 깨고 나와야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형성된 가치관을 깨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이 장자라는 책이다. 장자를 인용하여 나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며 일지를 작성하고자 한다.


장주의 이야기 중 까치, 매미, 사마귀가 등장하는 이야기 - 욕심에 대하여


거대한 날개와 큰 눈을 가진 존재의 까치는 사마귀를, 사마귀는 매미를, 장주는 까치를 보며. 사물들이 서로에게 속박된 것인냥 그들은 눈 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스스로의 맑은 연못을 잃어버 렸다. 까마귀를 잡기 위한 욕심에 남의 밤나무 숲으로 들어간 잘못을 반성하는 장주의 이야기이 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초등학생인 ‘나’는 부모님의 인정에 눈이 멀어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 렸던 것 같다. 그 행복이 너무 달콤했기에, 눈과 코와 귀가 있음에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며 그 존재와 멀어졌을 때 인지했다. 그리고 그 욕망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장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까치, 사마귀, 매미는 언제쯤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바로 잡아 먹히고나서 였을 것이다. 바로 ‘죽음’을 통한 변화인 것이다.


부모님의 인정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죽음과 재탄생을 통해 성장한 것이 아닐까. 욕심이라는 감정이 정말 무섭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부모님의 인정에 눈이 먼 것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절대 그 일의 책임을 부모님의 탓으로 돌리면 안된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혜시가 조문왔던 사례 - 죽음에 대하여


이 사례는 죽음을 애통해 하지 않는 장자를 나무라자 무와 유에 대한 이야기로 인생과 죽음에 대 해 생각하는 관점을 변화시켜주는 이야기이다. 나는 삶에서 두 번의 죽음을 보았다. 할머니와 외 할머니의 죽음. 외할머니와 나는 곁에서 함께 했었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추억을 쌓은 관계였다. 가끔 찾아뵈러 가는 것이 좋았고, 아직도 외할머니의 맛있는 식혜가 그립다. 평화로운 일상에 찾아온 첫 번째 죽음은 내가 20살이 되었을 때 일이다. 장례를 치뤘고, 마지막 모습을 보 러 할머니를 찾아갔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눈물 을 흘리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내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내 자신이 역겨웠다. 스스로 온전한 감정이 아닌 주변에 휩쓸려 느끼는 슬픔에 대한 죄책 감을 느꼈다. 할머니한테 미안했다.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눈물 을 흘리지 못했었던 이유를. 나는 그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보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것을 마주하며 온전히 느끼지 못한 것이다. 주변의 반응을 보고 투영된 죽음이란 존재를 얼핏 느꼈던 것이다. 두 번째 죽음에서 나는 할머니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온전히 스스로 슬퍼할 수 있었다. 무에서 유로 나아가는 것을 탄생, 유에서 무 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탄생은 즐거운 것이고 죽음은 슬픈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탄생과 죽음을 단지 하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여 해석해서는 안된다. 내 자식의 탄생 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다. 귀여운 돼지의 죽음은 분명히 슬픈 것이다. 그렇다면 돼지고기를 먹으 며 튼튼히 자라나는 나의 아이를 보는 것, 즐거운 일인가 슬픈 일인가? 탄생과 죽음을 단편적으 로 해석하게 되면 그저 나에게 느껴지는 감정에 치중하게 되어 이기적이게 판단하게 된다. 생명의 경중을 비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탄생과 죽음에 대해서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해야한다. 나는 죽음에 감사하고 탄생에 슬퍼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나아감은 우리의 운명이자 삶이다. 애통해하기만 하지 말고, 즐거워만 하지 않으며 단 지 그 기운을 느끼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가을 홍수편 - 겸손에 대하여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여 바다를 보게 된 황하의 우두머리는 북해의 신 약을 마주하고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임을 알게 되었다. 겸손에 대한 고찰을 제공하는 이야기이다. 바다는 텅 비는 법이 없고, 홍수와 가뭄도 전혀 모른채,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조약돌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며 살아간다. 시간에 멈춤이 없고, 분배되는 몫에 일정 불변함이 없고 그대로인 것이 없다. 단편적인 현재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행동해선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자 또한 시간으로부터 나와 똑같은 양을 분배 받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확실한 이해를 하게 되면 늦춰진다고 낙담하지 않고 남을 깔보지 않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겸손에 대해서, 우물안 개구리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우물조차 작은 미생 물에겐 바다일 테고, 미생물에게 바다가 있음을 때론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 중학교를 다녔었다. 사춘기 남자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두니 남성성을 과시하고 잦은 치고 받음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학교에선 큰 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작은 싸움은 넘어가곤 했다. 이유 없이 상대방을 깔보는 친구도 존재하였고,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남을 괴 롭히는 사람도 존재했다. 과시욕과 자신의 잘남을 표출하고 싶어하는 것이 마치 우물안에서 크게 우는 개구리 같았다. 그 친구가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면, 자신이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표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 친구보다 그릇이 더 크다면 바다가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는 의미이 다. 물론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것은 멍청한 행동이다.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해서 나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 또한 더 큰 폭력에 제압 당했을 때, 복종해야 하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시도하는 존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바다가 있음을 알려주고 우물 안에서 크게 울며 남들에게 피해 주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바다가 있음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 남의 시선에서는 내 표현조차 무례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선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 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하려 한다 해도, 착하게 말한 다 해도, 단어로 이루어진 말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다름이 보인다면 서로 배우는 자세로 협 력하여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를 우물 안에서 꺼내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씩 더 넓은 우물로 나오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고 배움 의 자세를 가지며 무지를 없애며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한 겸손은 고고한 척 하는 것에 그 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한다. 겸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다가오기 힘들게 만든다. 적당한 겸손으 로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고 싶다.


조금 밖에 모름 -이름, 사사로이 치우치지 않음.


이 이야기는 사람이 구별하는 것, 통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나타 내기 위해 큰 것을 쪼개고,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대 모아 부름 으로서 쉽게 나누려고 한다. 그 러한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혀 주고 수를 세아리는 것이다. 사물의 수가 만에 그치지 않지만 만물 이라고 한다. 그만큼 크다는 의미로서 계속 세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형체를 가진 것들 중 에 가장 큰 것, 음양은 기운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우주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변 화하고 커지는 것들을 여타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것들을 조각조각 잘라 논 쟁을 벌이는 것이 유의미한가? 나는 이 구절들을 한 줄로 요약하여 받아들였다. 무한을 인간의 잣대로 나누어봤자 무한이기에 인간의 편리를 위해 무한을 판단하려 하지 말라.


현실에 무한이란 것이 있을까? 1에서 무한한 범위의 수들을 생각해보자. 이 수에 역수를 취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0과 1의 값에 포함된다.


1에서 무한한 범위의 수 또한 결국 0과 1 사이에 있는 수와 그 집합의 범위가 같은 것이다.

0과 1, 하늘과 땅, 음과 양, 너와 나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무한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디에도 있는 것이 무한인데 그것에 대해 인간의 잣대로 나누려 하고 판단하려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장자 내편 –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


송나라에 손 트는 것을 막는 연고를 만드는 명수 한 사람 이야기.


손 트는 것을 막아주는 특별한 연고의 용도를 다르게 사용함으로서 더 큰 일에 적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일로서 세습된 관습이 틀을 만든 예시를 말하는듯 하였다. 그 편견을 깨고 더 크게 봄으로서 자유롭게 노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사회를 살아갈 때 틀 안에서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를 억제해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지양하자는 것이다. 목적지라는 틀 안에 갇히지 말고, 그저 거니는 것이다.


제물론.


그들의 견해들 사이에서 결정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하늘에 귀를 기울여라.


큰 지혜는 힘이 안들지만, 작은 지혜는 흠을 들춰내느라 바쁘다. 큰 말은 담박하여 아무 맛도 없 지만, 작은 말은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작은 공포들은 겁먹게 하지만, 극도의 공포는 착 가라앉 게 한다. 진정으로 통솔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그것의 조짐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는 작은 것들로 살아가는 것 같다. 서로를 작은 공포로 겁먹게 하고, 작은 지혜와 욕심으로 상대방을 헐뜯는다.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통솔하기 위해선 있는듯 하지만 스스로 그러하게 함으로서 저절로 통치가 되게 하는 것 이다. 작은 것들에 귀를 더럽히지 말고, 모든 것에 숨을 불어넣는 하늘에 귀를 기울이자.


사람들 사이의 세속적 업무. 인간세.
도가적 입장을 가진 자가 관직에 있을 때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 쓸모없고 기용할 수 없어서 정부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 것의 이점들에 대해 찬양한다.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신경 쓰지 말고, 잘 다스려지지 못하는 나라로 가라는 말로 인해 위나라로 가려는 안회의 이야기. 공자는 안회가 가서 처형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폭군의 면전에서 인의와 규정해 놓은 말들을 고집스럽게 설교한다면, 이것은 결국 누군가의 추함을 이용해서 제 자신을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게 될 것이다. 격식에 맞으면서도 사심이 없고, 부지런하면서도 한 결같으면 될까? 안된다.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덕이라는 것도 폭군에게는 충분히 자라지 못할 텐데, 최고의 덕은 말할것도 없다. 안으로는 꼿꼿하면서도 겉으로는 굽히겠다. 안된다. 귀로 듣 기보다는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기보다는 기운으로 들어라. 양으로서의 능동성과 음으로서 의 수동성 사이를 번갈아 오고 가는 기, 개념적 지식을 비워내고 감각의 통로들은 깨끗해져서 그 사람은 단지 지각하고 반응하기만 할 것이다. 그를 통해 하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보고 겸손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우물안에서 꺼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더 잘났다는 생각, 상대방을 깨닫게 해줄 수 있다는 오만이 부끄러웠 다. 개념적 지식을 비워내고 그저 지각하고 반응하기만 하면서 감각의 통로를 깨끗하게 한다면 이것을 통해 나를 가로 막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고 쌓으면 쌓을수록 그것들이 오히려 벽이 될 것이다. 그 벽은 또 다른 분단과 편견 을 낳을 것이다. 나의 마지막 나아감은 그 벽 조차 부수는 것이 아닐까. 성장한 내가 자연과 마 주하고 그 자연과 하나되는 경지. 그것이 장자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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