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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17. 2019

객사客死의 꿈이 필생必生으로 바뀌기까지

블랙홀을 통과하여 대전이란 도시로


나의 꿈은 객사客死였다.


전국, 세계, 넓게는 우주(아니면 지구 끝까지라도)까지 누비며 술병을 꼬옥 붙들고 온갖 볼 것들과 먹거리들, 즐길 거리들, 골목, 사진, 그림, 길거리 농구, 천체망원경, 영화, 책거리들을 누비며 살다가 길바닥이던 술집이던 도서관이던 아무 곳에서나, 가족 친지 아무도, 심지어 나도 모르게 숨지는 것. 20대를 살던 나에게 꿈을 물으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와. 지독하게 가난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가난 때문에 겪은 고통들을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그런가. 이젠 가난 이야기만 들으면 저거 또 푸념 떤다 하고 TV 채널을 바로 돌려버린다. 하지만 어쩌겠나. 다소 식상하지만 그들도 그랬도 나도 그랬다. 찢어지고 구멍 나게 가난해서 환장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했던가.

 

그래도 천성 맞게 심심한 건 죽는 것보다 싫어해서 친구들과 그럭저럭 시시껄렁하게 어울려 다녔다. 동네 친구들 모두 뼈저리게 가난해서 돈이 없다는 건 별 문제가 되지가 않았다. 돈이 없어도 놀 수 있는 건 많았다.

고3이 되어서야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었지만 소용없었다. 굶은 놈이 골수까지 쪽쪽 발라먹는다고 했던가. 여름방학 내내 비 새는 반지하 책상 앞에서 시중에서 파는 모든 문제집을 모아 놓고 모조리 다 풀었다. 모든 걸 외워버렸다. 다만, 수학만 외워지지 않았다. 단기간 점수 올리는 데에 한계에 봉착했다.

어찌어찌 공부해서 남들 고개 끄덕일만한 서울 중위권 대학에 입학했다. 롹밴드 보컬, 총학생회, 학과 학생회고 뭐고 가릴 것 없이 갇혀 있던 내 안의 짐승들을 한껏 풀어놓고 세상 끝까지 마이크 잡고 술 마시고 한풀이 실컷 했다.

전역 후,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진짜 공부라는 것을 만났다. 교수님 지도대로 논문이라는 것을 ‘제대로’ 써봤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음에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학자대회 대학원생 대상을 받았다. 나는 전공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학부부터 석사 졸업까지 총 8편의 논문을 썼다. 모두 수상작 아니면 KCI 등재였다. 그리고 두 편의 저서를 썼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력서를 들고 가면 사회에서는 싸늘하게 답이 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울분이 터졌지만 곧 이해했다. 사회와 공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받아들였다. 현실 그대로를. 투 잡, 쓰리 잡, 포 잡까지 뛰면서 집안 생계를 챙기고, 나를 돌보고, 연인을 챙겼다. 불평불만할 물리적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막다른 길이니까 내가 더 뛰는 수밖에.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바로 내가 서명한 계약서의 대가이니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냉담히 대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려고?”

묻는 회사 친구에게 가볍게 답해줬다.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나는 내가 필요한 삶을 불태우고 객사할 거라고. 싸늘하게 답한 내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공무원 시험 한 번 보고 죽어볼래?”

9회 말 2 아웃 2 스트라이크. 경기가 끝나면 이 구장을 떠난다. 그런데. 세 번째 날아오는 공에서 땅!

어! 어!?? 어!!!??? 넘어갔???? 네?????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것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나라는 행성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별안간 새로운 우주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2014년, 30년을 살았던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왔다. 이듬해 여름, 이 새로운 땅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우리는 2주 만에 결의를 맺고 호랑이가 산을 타고 넘어가듯 반년만에 결혼했다.

2018년, 첫 동이 트고 다섯째 되는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분만실 한가운데에서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로써.

객사客死의 꿈은 필생必生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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