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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19. 2019

복福에 겨운 짜증에 관하여

2019년 대전, 어느 평범한 토요일의 관찰기

주말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마실을 나간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부터 집 앞 공원, 수목원, 천연기념물센터 등 애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탁 트인 곳으로 나간다.

이제는 두 살 배기라고 애도 아빠 엄마가 옷을 갈아입으면 벌써 신발장 앞에 가서 자기 신발을 찾아 혼자 신겠다고 낑낑대고 있다. 아내가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일까 물었다. 셔츠, 멜빵, 츄리닝 중 어떤 거? 아디다스에 금색 신발 신겨 나가자고 했다.

현관 앞에 나오니 아들이 세발자전거 타겠다고 난리다. 바람이 좀 불겠지만 괜찮겠지 하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현관 앞을 나서려는데 아뿔싸. 비가 조르륵 조르륵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자니 준비하게 아깝고 아들도 난리 칠 테고. 유모차로 바꿔서 우산 챙겨 공원 앞 투썸 플레이스에 도착했다.

크아. 사람 봐라. 비가 오니 다 이리로 들어왔구나. 두리번거려봐도 출입문 앞자리 외엔 세 식구 편히 앉을자리가 없다. 그동안 무지하게 걸어 캐시 워크 포인트로 산 아이스크림 하나, 그리고 콜드 브루 하나 이렇게 주문했다.

생전 처음 먹는 아이스크림에 아들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숟가락을 자기 입으로 연거푸 가져간다. 애 한 입, 우리 한 입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나니 애가 이제는 자동 출입문에 꽂혀서 계속 그 앞에서 서성인다. 드러눕고 심지어 나가겠다고 생떼를 써서 아내가 문을 열어주니 이제는 그 앞에 엘리베이터를 타겠다고 까치발로 스위치를 누르려 안간힘을 쓴다.

위험해 보이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몇 바퀴 빌딩 안 복도를 빙빙 돌리고는 애를 들춰업고 다시 유모차에 태워 컴백홈. 습한 기운에 에어컨을 제습 운전으로 맞춰 놓고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애는 어느새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내가 속삭인다.

(두부 사 올 거야?)
(사 오지 뭐. 왜?)
(샌드위치 해 줄게. 올 때 롯데슈퍼랑 뚜레쥬르 들러서 베이컨이랑 식빵 같이 사 올래?)
(오케이. 근데 순대도 사 와도 돼?)
(어. 먹고 싶으면 사와.)

그 사이가 비가 그쳤다. 벌판에서 뛰어놀지 못한 애를 생각하니 못내 아쉽다. 동선 순으로 슈퍼부터 갔다. 주말 오후인데 제법 한산하다. 두부 코너 위치는 알아서 금방 바구니에 넣었는데 베이컨이 보이질 않는다. 마침 매장 직원 분이 보여 물었다.

“저 베이컨은 어딨나요?”
“조~기 있잖아요. 냉면 옆에.”
“아. 고맙습니다.”

냉면 옆에.. 냉면 옆에... 소시지, 족발, 훈제오리... 물건 찾는 눈이 선천적으로 어두운 나는 어딨지 어딨지 어딨지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빽!하고 외친다. 난 귀에 예민하다.

“냉면 옆에!! 안 보여요??”
“냉면 옆이면 여긴대요.....”
“나봐봐!”
“.......”
“나를 본 방향에서 오른쪽 봐요. 위에! 아래 말고 위에!”


(그냥 아줌마가 와서 쥐어주세요!!! 거기서 시키지 말고!!!)


속으로만 외치고 네.. 하고 빠져나왔다. 뚜레쥬르에 오니 여긴 더 사람이 없다. 그래 빨리 사서 나가자 하고 식빵 날짜만 확인해서는 휙 낚아채어 계산대에 올리려는데 순식간에 줄이 만들어진다.

이건 뭐지...

사탕 사겠다고 보채는 아이 통에 그 엄마는 달래고 혼내고 하면서 결국 안사고 빵만 사서 나간다. 그 틈을 치고서! 앉아 계신 아저씨 한분이 휙 손을 내밀어서는 커피에 휘핑크림 더 얹어달라 한다. 혼자 카운터 보는 사장님도 정신이 없어 보인다. 내 짜증은 점점 늘어난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띡 찍고서는 “네. 3600원 나왔습니다!” 한다. 엥? 식빵 하나가? 황제 식빵이야?

“이거 하나가 3600원이요?”
“아~~~ 요거 하나 하셨구나! 난 또 옆에 그거도 같인 줄 알았네! 호호.”

뒤를 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고 사이를 못 참고 식빵 옆에 꽈배기 하나를 두었다. 마이 갓. 포인트 취소. 결재 취소. 다시 포인트 결제. 카드 결재. 으악! 비명소리 터지기 직전 문을 뛰쳐나왔다.

좋아. 이제 마지막 관문이야. 순대만 사면 돼! 할 수 있어! 마음을 다잡고 바로 옆 가게로 가서 아주머니에게 ‘순대 내장 많이 주세요’ 하고 1인분 시켰다.

결재를 하려는데, 아 이런... 간이 아니고 내장인데... 내장을 많이 먹고 싶은데... 간이 전체의 반은 차지하는 것 같은데... 하늘이시여...

경보 세계대회 참여 선수의 발걸음으로 냅다 집에 도착했다. 아내에게 온 짜증 에피소드를 다 설명하려다 짜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지 음... 하는 생각에 식탁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고 서재로 쏙 들어가 버렸다.

못다 본 책이나 읽자. 벌러덩 누워 책을 펼쳐니 펄럭 펄럭 뭐가 얼굴에 떨어진다. 메모지다. 사이에 끼워둔 게 책갈피가 아니고 메모지구나. 뭐가 많이도 쓰여 있다.

보험, 집세, 부모님 용돈, 기부금, 대출이자, 카드값, 청약통장, 전화세... 블라블라. 

이번 달 나간 돈의 내역이구나. 아내가 육아휴직 들어가니 살림 참 빠듯해졌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은 감회에 젖는다.

내 인생에서 제일 많이 번 월급이네. 

이 월급이 우리 가족 변변치 않은 나들이, 먹거리, 입을 거리, 누울 자리를 보전해주고 있구나. 별 것도 아닌 것에 짜증 낼 수 있는 이 배부른 여유로움을 예전의 난 꿈꿔볼 생각조차 해봤던가. 나는 책의 제목을 읊어봤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그리고 부제도 읽었다.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이 행복에 겨운 노선을 타고 가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견뎌냈나. 보통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 것을 왜 종종 잊게 되는 것일까. 사회에서, 가정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 않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묵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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