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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22. 2019

그래서, 우린 지금 보통 사람으로 살아요?

아빠와 포장마차

총각시절의 언젠가,


집에서 오랜만에 쉬고 있자니 심심하기도 해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켜니 저명한 한국의 모 철학자가 나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논어에 대해 이것저것 강연하는데 무슨 얘기하나 보자 하고 철퍼덕 바닥에 누워 있자니 아빠가 와서 옆에 앉는다. 좀 듣고 있으려니까 아빠가 묻는다.

“넌 저 사람처럼 되고 싶냐?”
“되겠어요? 학위만 대여섯 개는 가진 양반인데.”
“그게 대단해 보이냐?”
“대단하죠.”
“그럼 행복해 보이냐?”
“행복해 보이는데요?”
“본인은 그럴 수도 있겠지.”

분명 저 학자는 행복해 보인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가며 칠판을 탕탕 두드리고, 밑줄 긋고, 크게 한번 동그라미 둘러치고, 침 튀기고, 사람들은 그걸 맞고, 아... 탄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문화가 경제로 갔다가 역사로 이어지고 이게 또 언어와 연결되고, 알고 보니 민족 간의 차이는 이런 것이고. 신났다 신났어. 정말 신이 내린 것처럼 말로 춤을 춘다.

아이고 이 양반 참 많이도 안다. 저걸 언제 다 외웠을까? 아니 외워지나? 그냥 이해하는 건가? 천재들은 원래 그런 건가?

“저 사람 저기까지 가는 동안 가족들은 어땠을까?”
“글쎄 뭐... 별로 신경 안 썼겠죠.”
“자기만 잘난 거야. 자기만 있는 거라고. 봐라 저 사람. 그럼 결혼을 하지 말던지. 저 가족은 행복할까? 저 사람 나가서 저러고 있는 동안 가족들은 어땠겠냐? 뭐든지 너무 파고들면 안 돼. 적당히. 보통사람으로 살면 되는 거야.”

순간 울컥했다. 다 망한 우리 집은 보통 집인가? 번번한 집 하나 없이 남들 벽면 티브이 보는 시대에 20년 전 박스 상자 티브이 하나 너덜너덜한 옷장 위에 덜렁 올려놓고 이런 사치의 대화를 부리고 있는 지금 우리 집은 그럼 제정신인 건가?

“그래서 우린 지금 보통 사람으로 살아요? 보통 사람이 뭔데요 그럼?”

짜증이 나서 누워있다 벌떡 앉아 질러 버렸다.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래도 우린 가족이 있잖아. 화목하잖아.”
“화목해도 돈이 없고 가난한 건 불행한 거예요. 평생 가난하게 살다 죽어도 보통은 아닌 거죠.”

손가락 사이에 꾹 쥐고 있던 칼날 같은 말침을 싸늘하게 던졌다. 아빠는 잠시 침묵하다 답을 했다.

“그래. 불행하지. 그래도 가족이 우선인 거야. 지금은 이해가 안 가도 나중에 네가 애 낳고 키워보면 그땐 알 거야.”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 데이빗 헬프갓은 떠나지 말라는 아빠의 ‘간곡하고 잔혹한’ 요청을 뿌리치고 꿈을 찾아 영국왕립음악원으로 떠난다. 그는 아버지의 평생 우상이기도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하고 피나는 연습 끝에 갈채 박수 속에서 곡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는 쓰러진다. 연주의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며 평생을 보내게 된다.


정신분열.

따지고 보면 세상의 많은 천재들이 그랬다. 모차르트는 시대를 앞선 프리랜서로 살다가 배고픔과 병마에 시달리다 레퀴엠(진혼곡) 4악장을 쓰는 도중 죽었다. 음악이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이라 믿었던 괴팍스런 베토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독 속에 죽었다. 친구와 여자, 사치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슈베르트는 음악으로 버는 대로 환란의 파티에 돈을 탕진하고 결국 성병에 걸려 요절했다. 피아노의 귀신 리스트는 재능 있는 음악가들만 챙기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생 숱한 여자 품 속에 살다가 이별의 슬픔에 못 이겨 돌연 성직자로 속세를 떠나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자아탐색에 대한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



국민학교 3학년 정도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빠 회사에 종종 놀러 가곤 했었다. (엄마가 이미 혼자 다니는 법을 알려줬다.) 가면 온통 책과 사진뿐이었는데 그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는 게 꽤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면, 돌아오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러 또 책 구경을 했다. 주로 세계여행 코너에 갔는데, 내가 뚫어지게 보는 책이 있으면 아빠는 가격을 불문하고 내 손에 꼭 들려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아빠가 회사에 놀러 온 나를 데리고서 퇴근길에 집으로 가지 않고 낙원상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포장마차였다. ‘여길 왜 왔나’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아빠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소주 몇 잔을 드시더니,

“너 홍합 먹어본 적 없지? 한번 먹어봐. 정말 맛있는 거야. 이거 맛없으면 아빠가 장난감 사줄게!”

이렇게 달콤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먹자마자 무조건 맛이 없다고 했다.(당시 나는 장난감 중독 말기였다.) 아빠는 찡그리는 내 얼굴을 보고 하하하 크게 웃더니 또 말없이 남은 소주를 비우고서는 근처 문방구에 가서 정말 문방구에서 제일 큰 로봇 장난감을 사주셨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너무나 들뜬 마음에 바람이 아주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빠에게 출판사에 대해 물으면, 아빠는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단지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말해줄게.”  이 한 마디뿐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30-40대 아빠의 삶은 내가 보고 느낀 것, 또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빠는 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예전 다니시던 출판사에서 매번 ‘이 달의 독서왕’에 뽑혔다고 했다. 출판사 도서관의 거의 모든 책을 다 빌려 봤다고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책들은 모조리 읽고 또 읽어 외워버렸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서예와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아직도 서울 집에 옛 도록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시 아빠의 열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빠는 회사를 나와 당신의 출판사를 세웠다. 창덕궁 앞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새문안교회 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하얀 3층 건물의 아빠 회사가 보였다. 1층에서 경비 아저씨가 늘 반가운 인사로 맞아주셨고, 2층으로 올라가면 수십 명의 직원분들이 286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꼬마가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와서는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주며 말동무를 해주셨다. 어두컴컴한 사진실 구경이 제일 재미났다. 새로 나온 디자인 책을 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3층으로 올라가면 파티션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고, 좌측 창가 맨 끝에 검고 두툼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책을 쥐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빠의 전성시대’는 15년을 채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한 차례 부도위기를 모면했지만, 곧이어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규모를 줄여 사직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지만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민학교 4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적막이 감도는 저녁상 앞, 엄마도, 아빠도 수저를 들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아빠는 천장을 올려봤다. 아빠의 왼쪽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빠는 말없이 소주만 드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익선동 살림을 정리하고 계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것이 서울을 떠날 준비 단계라는 걸 나는 뒤늦게서야 알았다. 외할머니가 상경하여 우리 남매를 돌봐주셨다. 엄마 아빠를 주말에만 보는 날이 늘어났다.

그것이 곧 내 인생 최악의 ‘부천 3년’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나 돌이켜본다. 아빠는 포장마차 함께 갈 친구마저 잃어버린 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떠난 거다. 더 이상 함께 마실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꼬꼬마 아들 손을 잡고 수수한 포장마차에서 홍합탕에 소주를 드셨을까.

바보 같은 놈.

종종 주말을 끼고 서울 출장이 잡힐 때면 나는 업무를 마치는 대로 외부 약속을 잡지 않고 곧장 서울 집으로 간다. 들어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빨간 소주 세병을  산다. 엄마는 저 몸도 안 좋은 사람들끼리 술 먹고 앉아있다고 야단법석이지만, 아빠는 화색이 돈다.

아빠와 나는 자작한다. 각자 따르고 싶은 만큼, 먹고 싶은 만큼 마신다. 그게 아빠와 나 사이의 불문율이다. 대전집 얘기, 손주 얘기, 뉴스 얘기, 책 얘기, 회사 얘기, 동네 친구들 얘기 가릴 것 없이 나오는 대로 주고받는다. 주로 묻는 건 아빠고 답하는 건 나다.

두어 시간 지나 아빠는 벌건 얼굴이 되어서는,

“후... 그래. 많이 마셨다. 난 이제 잔다.”

안방에 들어가 슬그머니 요에 누우신다. 나는 남은 잔을 홀짝 비우며 조그라든 아빠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아빠.
그때 못 드신 술,
언제든 나랑 많이 마십시다.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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