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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30. 2019

집은 ‘쇼룸’이다.

서울에서 온 대전인

                        지난 금요일 아침,

                 아내가 아들과 친정에 갔다.



아내는 나에게 모처럼의 혼자 시간을 즐기라고 했지만 웬일인지 썩 재미가 없다. 무엇보다 심심하다. 셋이 있을 땐 그렇게 좁던 방이, 혼자 있으려니 한없이 넓어만 보인다. 남들은 아내 친정 가는 날이 계 타는 날이라는데, 나는 그리 달갑지 못하다. 무리를 해서라도 따라갈걸 하는 후회가 든다.

총각 때 관사에서 뒹굴던 생각이 났다. 사실상 투룸인 원룸을 배정받아 원 없이 넓게 썼다. 야근 후 늦은 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내 보금자리로 기어들어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잠이 들어버리는, 뭔가 텅 빈 하루의 마무리가 안방 천정에 그려졌다.

연타석 공식 행사에 몸까지 지쳐 토요일 아침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겨진 셔츠처럼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배가 고파 일어나 보니 두 끼 먹을 정도의 음식은 아내가 해 두고 갔다.

밥을 먹고 티비를 보다 뭘 할까 한참을 생각해 봤다. 하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봤다.  

거의 7-8편의 영화를 본 것 같다. 가만히 보면 잡생각이 들쭉날쭉 올라와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병행했다. 안시성, 본 콜렉터, 인시디어스, 이퀄라이저, 쉰들러 리스트, 월드 인베이젼, 제이슨 본, 눈에 들어오는 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대로 봤다.

다시 보는 영화는 언제든 좋다. 매번 봐도 느낌이 다르고 똑같은 씬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어 좋다. 특히 쉰들러 리스트의 리암 니슨은 테이큰의 아우라를 벗겨내고 볼 수 있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

잠들기 전,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다면 일어나서 당신의 침구부터 정리하라’는 미국 고위 장군의 연설을 봤다. 사소하지만 해내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끊임없는 동기부여를 준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 내일은 청소하자.

뭐부터 청소할지 막막할 정도로 일감이 넘쳤다. 그래 이건 게임이야. 한 공간씩 공략하자는 생각으로 거실의 아기매트를 닦아 말리고, 장난감과 아기책을 제자리에 두고, 쓸고 닦으니 배가 고파왔다.

뭘 먹지?

샘머리 분식도 지겹고, 라면은 더 싫고, 빵은 간식인 거고, 아점으로 가정식 백반이 먹고 싶었다. 아내에게 집의 재료로 내가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무엇이 있을지 물었다.

“냉동실에 만두 있어. 물 끓이고, 참치액기스 붓고, 만두 넣고, 파랑 계란 넣으면 돼.”

도마 위에 파를 두고 큰 칼로 통통통 썰어 끓고 있는 만둣국 위에 사르르 부었다. 국물에 만두를 적셔 먹어보니 와우! 처음 만든 것치곤 꽤 괜찮았다.



모든 방을 쓸고 닦고 식탁 정리, 서류 정리,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쓰레기, 분리수거 하나하나 쪼개고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술이 동했다. 과음보다 나쁜 게 무운동이라는 뉴스가 생각나 계단을 이용했다. 6층에 다다르니 숨이 탁 치고 올라왔다. 9층에 다다르면 어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생각하지 않고 힘이 들어 오히려 좋았다. 또 배가 고팠다.

저녁은 뭘 먹지?

아내에게 냉장고를 털어 내가 좀 더 고난이도 요리를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오징어 숙회를 먹으라고 했다. 이번엔 세세히 묻지 않고 나 나름대로 만들었다. 두부도 있어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독소 빼는 데는 레몬 물이 좋다는 이야기에 레몬도 하나 시큼하게 썰어 유리병에 넣고 찬물을 채웠다.



완성된 식단을 아내에게 보여주니 앞으로 더 집을 비워야겠단다. 재미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나 홀로 집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으니 이번 주말 집돌이 생활은 꽤 성공적이라는 총평을 스스로에게 내린다.

이제 셔츠와 바지를 다리고, 돌돌이로 옷 먼지 떼고, 구두를 솔솔 닦으면 출근 준비는 끝난다.

내일이면 아내와 아들이 온다. 출장이 너무 많다. 틈만 나면 집에서 가족과 있고 싶다. 그게 나에겐 진정한 휴식이다.



입사 후 첫 거처는 탄방동 원룸이었다. 나중에 관사로 옮기기까지 대략 8개월 정도 그곳에 살았다.

방음상태가 매우 불량했다. 내 좌우 룸 모두 누가 살고 있는지, 라면 먹는지 싸우는지 티비를 보는지 사랑을 하는지, 아주 세세한 것들까지 생생히 들렸다.

특히 내 오른쪽 룸은 거의 난장판에 가까웠다. 한 커플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날이면 날마다 다투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화해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그럴 땐, 남자가 문을 쾅 닫고 어디론가 나가버린다. 화장실로 독한 연기가 퐁퐁퐁 잠입한다. 화장실 문을 꼭 닫아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작은 쪽방에 툭하면 대여섯 명쯤 되는 친구들이 몰려와서는 술 마시고 소리 지르며 밤새 뛰어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격무로 곯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두지 않았을 것 같다.

현아 '내 집에서 나가'(2015)를 듣다 보니 그 방이 집이었구나 싶다. 나는 단순히 룸을 잠만 자고 나가는 임시거처로 썼지만 그 사람들은 룸이 '집'이었던 것 같다. 옆은 없는 거다. 내 집이니까. 작던 크던 그건 그 사람의 세계인 거다.

유명한 건축가 모씨는 집은 쇼룸이 아니라고 했다. 집값을 올리기 위한 온갖 작태의 ‘부동산 쇼’를 벌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싶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라면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팔고 말고 할 여력이 없다. 그것보다 어떻게 하면 단란한 우리 집을 만들 수 있을지에 더 많은 고민을 쏟는다.



은교가 청소 도중 실수로 쓰러뜨린 우편물 더미를 황급히 쌓아 올리자 이적요 교수는 그 우편물들을 다시 일일이 빼내어 자리를 재조정한다. 타자에게 우편물은 그저 뭉터기였지만 주인에게는 중요한 생각의 질서임을 보여준다. - 영화 ‘은교’에서



얼마 전, 알라딘 대전시청역점에 대량의 클래식 CD가 매물로 나왔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가들의 레어템들이 넘치고도 흘렀다. 물량으로만 따져도 족히 200장 이상은 넘어 보였다. 당장 구입해야 할 리스트를 후다닥 체크하여 캔버스 가방을 챙기니 아내가 어디 가냐 묻는다.

“알라딘에 좀 다녀오려고.”
“뭐 팔려고?”
“파는 게 아니고 사려고.”
“좋은 씨디 나왔어?”
“어어. 아주 좋은 음반들로만. 누군가 돌아가신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

일정하게 정해진 카테고리 내에서 일정한 예술가의 명반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누군가가 단독으로 모은 애장품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클래식 애호가는 이문을 남기기 위해 자신이 모은 음반을 팔지 않는다. 필시 본 소유자가 죽고 난 후에 물려받은 자에게 처분된 것일 테다.

알라딘 중고매장이 초창기 문을 열었을 당시, 혀를 내두를만한 ‘센 것’들이 서울 이곳저곳 영업점에 쏟아져 나왔다. 퀄리티로 따지면 강남점, 일산점이 탑이었다. 두 곳 다 생업 일선에서 물러난 세대들이 가까이 사는 곳이었다.

여윳돈이 생기면 부리나케 가서 그것들을 쓸어왔다. 그렇게 약 10년 간 사고, 듣고, 소장하고,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되팔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컬렉션을 만들어 갔다.



나는 서울 집에 단단한 원목장을 하나 사서 내 방에 하나의 ‘음반 숲’을 구성했다. 음반들을 작곡가별로 모아두는가 하면, 특정 연주가 별로 묶어두기도 하고, 가장 많이 듣는 씨디는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별도의 받침대 위에 진열해두기도 했다.

중고의 가장 큰 매력은 물론 저렴한 가격일 테지만, 그것만큼 끌리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음반 안에 담긴 여러 사연들이다. 어떤 것은 연주자의 친필 싸인이 새겨져 있는가 하면, ‘이것은 베토벤 초연 당시의 작품을 당시의 스케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니 상당히 들어볼 가치가 있다’라는 깨알 같은 메모장이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이 음반 나 대신 잘 간수 좀 해주오’ 하는 것 같았다.

서울 집 내 방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일종의 성이었다. 몇개만 빼도 한 축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각각의 책장은 나름의 이유에 의해 촘촘히 짜여 있었다. 나조차도 함부로 옮기기 어려웠다.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불가피하게 내 물건들은 대전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동생이 내 방을 쓰겠다고 한 것도 그렇거니와,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내 물건의 일부를 무작위로 빼내어 박스에 담아버렸다. 나는 내가 옮길 테니, 어느 누구도 한 번만 더 내 물건에 손 대면 다 태워 버리겠다고 공언했다.

대전 괴정동 원룸으로 이사 올 때, 당장 필요한 씨디들을 엄선해서 신주단지 모셔오듯 가지고 내려와 책상 앞에 진열해 두었다. 볼 때마다 한결 마음이 나았다.

원룸에서 관사로 옮기고 나서는, 나만의 ‘미니 서재’를 꾸렸다. 단박한 씨디장 하나를 구하여 속은 음반을 채워두고, 겉은 책을 쌓아두어 언제든지 꺼내어 듣고 읽을 수 있게 짰다. 야근 후 집에 돌아와 샤워 후에 드러누워 요 조그마한 나의 세계를 구경했다.


결혼 후에 서울의 거의 모든 음반을 내렸다. 나는 서재의 진열대와 별개로 TV 옆에 다시 조그마한 음반의 세계를 꾸렸다. 아들이 7개월을 넘기면서 음반 진열장에 눈을 두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두 개의 세계가 함께 했다. 감상의 세계, 그리고 놀이의 세계.

음반을 모두 꺼내어 비비고 물고 빨고 하는 동안, 나는 최소한 음반이 손상되는 정도만 관찰하면서 최대한의 놀이터를 만들어준다. 감상과 놀이가 교집합을 이룰 그때까지. 이건 무엇인지 저건 왜 그런 것인지 물어볼 때까지. 함께 논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모델하우스의 지침대로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모델은 어디까지나 모델일 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이 있고, 제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끊임없이 집안 곳곳을 꾸미고, 고친다. 쌍둥이라도 똑같은 얼굴일 수 없듯이, 동일한 아파트 내에서도 집집마다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쇼냐고? 당연히 나를 위한, 가족을 위한,  손님을 위한, 심지어는 귀신까지 모셔오기 위한 끊임없는 쇼다. ‘건축물’로 보면 보이지 않는다. 물건을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총각일 때야 내 방 외엔 관심도 없다. 그리고 내 방 안에서도 나에게만큼은 아주 핵심적인 것들, 꼭 갖추어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것들은 집이 바뀌고 공간이 바뀌어도 그 형태가 그대로 존속된다.

신혼이 되니 두 집 살림이 합쳐진다. 책장 배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방으로 들일 것인가, 거실의 파티션처럼 쓸 것인가. 집에 손님 들이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거실에 기다란 좌식상을 깐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온통 벽이며, 가구며 전등을 걸어두어 밤이면 제법 겨울 분위기가 연출된다. 대신 씨디장이며 오디오 배치는 내가 맡는다. 이렇게 하나하나 맞추어간다.

아이가 생기면서 이 모든 신혼살림은 점점 아기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다. 울타리 안은 아기만의 포근한 세상으로 변신한다. 아기가 울타리를 부수고 나오면, 본격적인 세 사람의 가족생활이 시작된다. 아기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물건, 그렇지 못한 물건들이 재편성된다.

세 사람은 밥자리를 함께 한다. 아기도 의자에 앉아 밥 먹기 연습을 다져 나간다. 부모의 식사시간에 맞추어 한 술 두 술 먹어가며 엄마 아빠는 무엇을 먹는지 두리번거린다. 아기에게 집안의 모든 물건은 구경거리가 된다. 새롭기만 하다.

집이야말로 가장 역동적인 쇼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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