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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Jun 28. 2019

국영수보다 노래를 택했다.

모든 예술은 무대에서 만난다.

리듬 체조하면 나는 신수지, 손연재보다 가수 김완선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익선동 중앙문화센터에서 ‘기분 좋은 날’ 노래에 맞춰 공연했던 꼬꼬마 내 동생이 주인공처럼 따라붙는다.



엄마 아빠는 자식의 ‘국영수’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예체능’ 가르치기에만 집중했다.

나는 맨 처음 배운 사교육이 웅변이었다. 교동국교 옆에 학원이 있었다. 선생님 한 분이 1:1로 매일같이 연설하는 법, 자세 잡는 법, 제스처 부리는 법 등을 코칭해주셨다. 몸에 익을 때쯤, 학원에서는 나를 전국대회에 내보냈다.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간 기억이 난다. 강당 안에 나 같은 아이들과 엄마, 할머니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틈 바구니 속에 껴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무대에 서고 마이크 앞에 다가갔다.

“여러~분! 쬐!끔한 꼬마라고 얕!보지 마~십시오!”

첫 대사였다. “이 연사! 외칩니다~~~~~!”. 마지막 대사였다. 중간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등 내용이 많았는데 지금은 처음과 끝만 머릿속에 있다. 수상자를 호명하는데 오랜 시간 내 이름이 나오지 않자, 나는 지겹고 재미도 없어 할머니를 끌고 집에 가자고 대롱대롱 졸랐다.

강당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대상!"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뜨악하고 들어갔다. 내 다리만한 트로피와 함께 수상 기념 녹음 테잎을 받았다. 내 동생은 그 녹음 소리가 재미있다고 몇 년을 반복해서 틀어놓고 따라 했다. (나보다 대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웅변과 병행하여, 아빠는 중앙문화센터(지금 익선동 가든타워 옆자리)의 기초 바둑 코스에 나를 보냈다. ‘두 집이면 산다’, ‘땅따먹기 정도다’ 이해하고 나니, 곧 와룡동 사설 바둑학원으로 배움터를 옮겼다. 고씨 선생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 집 거실에는 선생님과 조훈현 9단이 같이 찍은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었다. 책을 보며 기본 정석을 배우고, 친구들과 놀이 바둑도 두었다.

집에서는 아빠와의 대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두었는대도 아빠를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너는 남이 어디 두는지 안 봐? 니 돌만 둘 거야?” 하시며 종종 몇 수 물려줬다. 더러 시무룩해져 있으면 술에 취했다며 일부러 져 주시기도 했다.

바둑과 병행하여, 익선동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5년 동안 배웠다. 제일 재미없었다. 선생님이 틀릴 때마다 손가락을 탁탁 쳤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하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꾸역꾸역 다녔다.

그래도 운현 국교 바이올린 합주부는 재미가 넘쳤다. 뭔가 수십 명이 모여서 한 곡을 위해 합심하니 그럴듯한 관현악단의 느낌이 났다. 휴식시간마다 선생님이 켜는 음악이 있었다. 하루는 물끄러미 듣다가 “선생님. 그거 지고이네르바이젠 아니에요?” 질문하자, 이후부터 선생님은 나에게 상당히 많은 테크닉과 지식을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바둑, 피아노, 바이올린과 함께 서예를 병행했다. 아빠의 지인 분이 운영하는 파고다공원 근처 학원이었는데, 영뽀와 영뽀 동생 이렇게 셋이서 다녔다. ‘스승님’이라 부르고, 인사는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여 모든 대화는 ‘다나까’로 끝났다. 어린이 작품대회 때, 스승님은 천자문의 한 구절을 내려주셨다.

(척벽비보 촌음시경 : 자만한 구슬이 보배가 아니요, 한치의 시간을 다투라)

미술과외도 받았다. 영뽀네서 배우기도 하고 선생님 댁으로 가기도 했다. 뭘 배웠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대략 댓생, 수채화, 유화 그런 것들인 것 같다. 그저 영뽀와 함께 시시덕거리고 선생님과 농담 따먹기 하는 게 즐거웠다. 대학생 여 선생님이었는데, 상당히 쾌활하고 아이들 마음도 잘 이해해주셨다.



집안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모든 예능 교육은 사실상 끝이 났다. 더 이상 집에서의 뒷바라지는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별 돈 들이지 않고 가성비 좋게 즐길만한 취미를 찾아갔다.

노래.

듣는 대로 부를 수 있는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웬만한 발라드, 팝송은 수준급으로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변성기가 찾아오면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생겼다.

Rock.

남자애들 사이에선 김경호 열풍이 부는 시대였다. 중학교 시절, 쉬는 시간이면 온 교실이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누가 더 고음이 많이 올라가나, 바이브레이션 할 수 있나 없나 서로 자랑질하느라 바빴다. 한쪽에선 초고음 곡들만 선곡해서 틀어놓고 머리 흔들고 기타 치는 시늉하고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 부르는 거지?

이 곡 저 곡 듣다 보니 가수마다 고음을 내는 방법이 다름을 알았다. 선천적으로 고음역대의 성대를 지닌 자보다 제 나름의 훈련을 통해 고음을 터득한 자들이 훨씬 많음을 알게 되었다. 가장 핵심은 반가성에 있었다.

부르기보다 듣기에 집중했다. 잘 부르는 사람의 곡보다 이제 막 고음 터득에 성공한, 약간은 어설픈 가수들의 곡을 더 찾아들었다. 저 사람이 소리를 어떻게 끌어내는지 더 효과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약 반년 정도가 지난 후, 가성에 목소리를 실어 부르면 초고음역대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노래방에서 어설프게나마 같은 곡 위주로 계속 끊임없이 반복의 반복을 거듭한 연습이 이어졌다. 머지않아 재능이 아닌, 후천적 학습에 의한 노력의 선물이 내게 주어졌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롹 밴드 동아리 오디션에 찾아갔다. 문과대 밴드에 괴물 같은 보컬리스트가 영입되었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첫 무대 오프닝에서 나는 레드 제플린의 "Rock&Roll"을 불렀다. 외국 여성 보컬이 부른 버전으로. 

모든 예술은 다 통한다.

무대에 오르면서부터 알았다. 무대 위에는 웅변,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 심지어 바둑, 서예까지 모든 것들이 다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곡 하나를 표출하는 데 있어 그 간 배웠던 모든 것들이 든든한 근간이 되어 주었다. 부모님께 감사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 남매는 예체능을 다시 쫓아갔다. 동생은 웬만한 춤은 다 출 수 있는 댄싱 회사원이 되었고, 나는 그림 따라 음악 따라 사는 흥겨운 회사원이 되었다.

그림을 보면 음악이 생각나고, 음악을 들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노래를 부를 땐 상상을 끌어오고, 글씨를 쓰면 생각을 담는 묘한 즐거움이 돌돌 뭉쳐 어느새 꽝 폭발하는 쾌감이란, 나로서는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며칠 전, 스트레스 좀 풀겠다고 동네 코인 노래방에 다녀왔다. 고공을 가르는 롭 할포드는 온데간데없고, 15분 부르고 핵핵거리는 아저씨 한분이 주책없이 앉아있었다.


기량을 되찾을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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