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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10. 2019

누가 익선동을 환상이라 부르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익선동 골목길



1996년, 윤종신의 ‘환생’이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노래 가사보다 앨범 재킷에 보이는 익선동의 한 식당이었다. ‘맨 회사 아저씨들 점심 먹으러 다니는 집 앞에서 무슨 개폼이지?’ 픽 혼자 웃고 말아 버렸다.


‘강호’라는 식당은 익선동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다. 운현 초교와 교동초교 사잇길로 쭉 들어오는 길. 지금은 맛집 탐방의 스타트로 자리 잡은 길. 나에게는 등하굣길이었다. 그리고 탈출의 길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 번은 익선동 전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었다. 전단지 만드는 집에서 화재가 났는데 하필 그 집 옆이 동네 가스집이었다. 수십 개 LPG 가스통이 빼곡히 들어선 집으로 불길이 닿지 못하도록 소방관 수십 명이 달라붙어 세 시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막아냈다. (나중에 와보니 아저씨 얼굴들이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다)

‘가스 집에 불났다! 불났다!’ 소리에 전 주민이 그 ‘강호길’로 좀비 떼처럼 줄행랑을 쳤다. 안국역 인근까지 수백 명의 주민들이 대피해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을 업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리고 그 사이, 불현듯 스치는 한 사람. 치매를 앓고 있던 고모할머니를 두고 나왔다.

갑자기 아빠가 “할머니 두고 왔잖아!” 하며 나를 내려놓더니 다시 동네로 뛰어들어갔다. “그냥 와! 그냥 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지르는 엄마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한 오분쯤 지나서인가, 길의 시작점에서 아빠가 할머니를 업고 두두두두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슨 홈 세이프를 외치는 감독처럼 막 손짓을 해대며 아빠를 불렀다.

한참 지나 소방관 한 분이 터덜터덜 길에서 나와 “불 껐어요. 들어가세요” 하자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천길을 돌아 다시 환생의 길로 들어섰다.



‘어쩌다 어른’에 유현준 씨가 나왔다. 익선동 골목길이 뜨는 진짜 이유가 “하늘이 있냐 없냐의 차이”란다. 웃음이 난다. 익선동 골목길에서 하늘을 보면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보일 것 같이 이야기한다. 여기 한번 10년 정도 살아보면서 골목길 좀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 익선동이라 부르는 골목길은 대부분 낙원상가 옆에 위치한 장소인데(그래서 엄밀히 익선동도 아니다) 당최 하늘을 볼 여유가 없다.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재편성해서 뚫어버렸다. 아마 지금 토요일 오후쯤 가면 에버랜드 놀이기구 기다리는냥 기차놀이하며 걸어가고 있을 거다.

내가 본 익선동 골목길은 개똥 피해 다니느라 하늘은커녕 바닥만 눈으로 훑어가는 길이었다. 국민학교 철조망 틈 사이로 뛰어내려 집으로 빨리 가는 지름길, 피아노 학원 가기 싫어 쭈뼛쭈뼛 걸어가던 길, 애들이랑 밤늦게까지 축구하다가 엄마한테 된통 혼난 길, 가스 집 불 나서 온 동네 사람 도망 나오던 길, 요정 아가씨들 한껏 차려입고 오고 가던 그 길에서 무슨 하늘이 보이니 안보이니 그러고 앉아있나.



“걷다 보면 새로운 풍경의 연속”이라는데 뭐가 새로울까. 본인이 말한 대로 죄다 식당이고 카페인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서고 없어지는 그거 말하는 건가. 그러면서 앞으로 배달문화로 식당도 없어질 걸 걱정하고 있는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불경기에 쓸데없는 돈 안 쓰고 할인쿠폰 받아 집에서 아늑하게 식사하겠다는 배달민족의 생각이 과연 나쁜 걸까.

온갖 아름다움으로 골목길을 버무리는 전문학 컨설팅 개발업자 덕분에 골목길 주변 땅값만 하늘 모르고 치솟는다. 거기 가서 본인이 직접 가게 차려 놓고 하늘을 봐라. 하늘이 보이는지 손님이 보이는지 한숨이 나오는지.


본인이 그토록 좋아하는 베네치아 갈림길의 낭만, 자연의 빛이 과연 느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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