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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11. 2019

엄마가 죽었어요

바른생활에 맺힌 한



스무 살 5월, 영뽀와 나는 ‘농활’에 갔다. 정확히 말하면 반강제로 끌려갔다. 새내기 남자들은 힘쓰는 일이라면 무조건 1순위로 차출되었다. 밀레니엄 시대에도 여전히 학과 내 엄격한 위계와 질서, 내규 같은 것이 있었다.

말이 농촌활동 봉사이지,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생전 낫 한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갔으니, 한 해 농사지으신 어르신들은 얼마나 답답했으랴. 하나하나 알려주면서 하느라 오히려 작업 시간만 늘어났다. 그래도 주민들은 어린 학생들을 잘 받아주셨다.

일이 끝나면 선배들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형님’이라 부르라 하며 밤새도록 막걸리를 마시게 했다. 너무 피곤해서 몰래 들어가 쪽잠이라도 잘라치면 심각한 얼굴로 들어와 지금 잠자러 온 곳이냐 혼구녕을 내며 눈꺼풀이 쏟아지는 학생들을 일으켜 세웠다. 선배들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농활 마지막 날 이른 아침, 영뽀가 집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머니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뽀는 전화를 끊고서는 한참을 서성이며 ‘뭔가 이상하다, 뭔가 불안하다,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먼저 출발하자고 했다.

그 날의 싸늘했던 선배들의 눈을 잊을 수 없다. 꾀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둥, 함께 움직여야 한다며 우리들의 선출발을 한사코 말렸다. 부아가 치미는 나는 화를 꾹꾹 누르고, 욕을 하든 말든 영뽀와 함께 먼저 출발해버렸다.

가는 버스에서 다시 한번 연락이 왔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영뽀는 집에 들를 것도 없이 바로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버스에서 가는 내내, 영뽀는 두 손에 깍지를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영뽀는 사실 수년간 엄마의 간병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매일같이 병원에서 쪽잠을 잤다. 학교와 병원을 오고 갔다.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뽀는 고3 중간고사에서 평균 90점을 넘겼다. 고2 성적에 비해 약 50점이 오른 점수였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폭발적인 성적 향상의 강력한 동기는 하나였다.


혹시라도 엄마의 바람대로 좋은 대학을 가면 엄마가 호전될 수 있지 않을까.


빡빡머리를 시원하게 쓸어 올리며 성적표를 쥐고 환하게 웃던 영뽀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영뽀는 엄마 상태가 다시 좋아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에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병원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각자 익선동, 삼청동으로 돌아갔다.

나는 서둘러 집에 가서 엄마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급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찰나, 집 전화가 울렸다. 엄마가 쥔 수화기 너머로 영뽀가 울고 있었다.

아줌마. 우리 엄마가 죽었어요. 내가 집에만 가지 않았으면 엄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이에 죽었어요. 엄마를 못 봤어요.



언젠가 술자리에서 영뽀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쌍뽀가 이런 질문을 꺼냈다.

“예전엔 영뽀가 엄청 자유분방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완전히 바른생활 인간이란 말이지. 왜 그럴까?”

그 질문엔 내가 답했다.

“영뽀가 바른생활을 시작한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야.”

영뽀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에 너가 그랬잖아. 이제부터 내가 엄마라고.”
“아... 그랬던가.”

영뽀는 선천적으로 자기 섹터, 자기의 것, 자기의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깔끔하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면서, 영뽀는 점점 더 자기만의 규칙을 엄격하게 정해 나아갔다.

수많은 친구들이 사고를 치면 대부분 영뽀가 수습했다. “야 이 새끼야! 지나가는 사람 백 명한테 물어봐! 지금 니 행동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두다다다 성질내면서도 웬만하면 다 보듬어줬다. 영뽀는 우리들의 엄마였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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