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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17. 2019

그림을 보려면 니가 그려봐 1

다시 피아노 레슨

대전 술의 전당에서

백건우 선생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3번 연주를 듣고 나서야 그날의 연주곡이 공연 직전 왜 다 바뀌게 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문제는 손이 아니라 피아노였다.

피아노 상태가 이상했다. 나 같은 무지한 사람도 느껴질 정도라면 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백건우 선생은 다시 고른 곡을 견고하게 마무리 지었다. 기립 박수를 받았다.

본래 2,10,15,8번이었다. 8번 비창을 제외하고는 어찌 보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매우 잔잔하고 목가적인 느낌마저 드는 레퍼토리였다. 선생은 늘 이런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런 것을 즐겼다. 그러나 저 건반으로는 그 감성을 보여주기엔 무리가 따를 수 밖엔 없는 상황이었다.

4,24,13,26번을 연주했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혼탁한 소리가 났고, 저음으로 갈수록 문제가 심각했다. 음이 뭉개졌다. 그래서 선생은 저 강렬한 곡들로 아주 피아노를 아예 뭉개버렸다. 베토벤의 여성적 면모를 과감히 내려놓고, 사자 같은 손으로 건반을 위에서 내리꽂았다. 마치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앵콜은 없었다. 잽싸게 사인회 줄에 합류했다.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선생님 손 한번 잡아볼 수 있을까요?" 했더니 웃으시며 흔쾌히 손을 내밀어 잡아주신다.


그 매끈함. 그리고 따듯함.



선생의 리사이틀 이후 한 동안 집에서 클래식을 듣지 않았다. 아내가 웬일이냐 묻길래 있는 대로 대답했다.

“들리지가 않아서.”
“뭐가 안 들린다는 거야?”
“그러니까... 일종의 한계가 왔다는 거지. 그 이상의 뭔가가 안 들려.”

10년 가까이 이 곡 저 곡 찾아 듣고, 같은 곡을 비교해 듣기도 하고, 신보가 나오면 득달같이 사서 듣고 하면서 제 나름의 ‘들리는’ 기쁨을 누려왔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화가 친구 말이 맞았다.

“그림 보려면 니가 그려봐. 수업 들어봐도 실기 쪽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은 확실히 차이가 있어. 자기가 그릴 줄 알아야 뭘 설명하지.”

피아노를 다시 쳐야겠다 아내에게 고하니 그거 마침 잘 됐다며 술 마실 시간에 예술활동을 하면 얼마나 좋겠냐 매우 반겼다. ‘그렇다고 술을 안마실 건 아닌데...’ 갸웃했지만 여하튼 그 말도 일부 맞고 그러면 살도 좀 빠질 테고 일석삼조로구나 싶어 당장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했다.



학원은 회사를 오고 가며 봐 둔 곳이 있었다. 정부 대전청사 바로 맞은편 빌딩에 있어서 집, 직장과 병행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학원에는 총 7개의 방이 있었다. 복도와 복도가 만나는 중앙 홀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는 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빵빵한 에어컨, 널찍한 소파, 정수기와 커피머신, 냉장고(아이스크림과 두유가 들어있다)가 갖추어져 있고 대형 티브이까지 달려 있어 드러눕기에 딱 맞춤이었다.



훤칠한 키에 하얀 얼굴, 네이비색 바지에 하늘색 차이나 칼라 차림을 한, 내 또래 정도의 선생이었다. 인상이 무척 밝고 시원시원한 말투를 가진 넉살 좋은 피아노맨. 소파에 마주 앉아 잠시 오티 시간을 가졌다.

“피아노 예전에 쳐 보셨어요?”
“아. 네. 한참 전에... 초등학교 때죠 뭐. 하하하.”
“아 그럼요! 예전에 뭐 피아노 학원 열풍이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피아노 다시 하시려는 뭐 이유가 있나요?”
“아. 이유요. 이유 가요... 그걸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듣기만 하다 보니까 직접 쳐봐야겠다 싶어서요.”
“주로 뭘 들으세요?”
“가리지 않고 다 들어요. 근데 쇼스타코비치, 말러 이런 쪽은 잘 안 듣고요. 딱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까지는 듣습니다.”
“아! 쇼스타코비치! 저도 그건 어려워서 안 들어요. 어유! 굉장히 많이 아시네요.”
“듣는 정돕니다 네. 딱 고기까지요.”
“그럼 치고 싶은 곡이 있으세요?”
“네. 트로이메라이요.”
“아! 트로이메라이! 좋은 곡이죠. 좋은 곡입니다. 그러면요. 일단 한번 손 풀고 갈까요?”

하여 선생님은 그랜드 피아노로 나를 안내하더니 편하게 앉아보라고 한다. 털석 편하게 앉으니,

“아. 이 정도는 너무 가까워요. 조금 더 뒤로. 네 좋습니다. 의자도 조금 더 뒤로 네. 근데 의자를 다 앉는 게 아니라 반 정도만 엉덩이를 얹는 느낌으로다가 네 지금 딱 좋네요! 딱 그렇게 계세요!”

‘옛날에 이런 걸 배웠던가’ 디테일 쩌는 강습에 내심 오그라드는 마음을 추스르려는 찰나, 선생이 간단한 악보 하나를 가져와 올려놓고 다짜고짜 쳐 보라 한다. 딩동 딩동 치니 이번엔 다른 악보를 준다. 듄다듄다 아까보다 까다롭긴 하지만 어렵지 않은 레벨이었다. 선생이 지켜보더니 ‘네 오케이!’를 외치며,

“자! 바이엘 하 부터 갑니다.”
“바이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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