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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04. 2019

양반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익선동 이전



언젠가 아내가 서울집 제사 때 우리 엄마 살던 두테비 마을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본관을 여쭤보니 ○○김씨라 하여 “○○김씨 양반 마을이었나보네요” 하니 우리 엄마 하는 말,

“에이~~ 옛날에 다 족보 사고 그랬겠지.”

그 이야기를 듣고 빵 터져서 한참을 웃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럴 법도 한 것이, 엄마는 어디가서 예의나 격 떨어진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당신 처신이라든지 자식 교육에서만큼은 굉장히 엄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양반 집안 몇 대 손이요’ 가르치는 우리 아빠도 항상 못 마땅해했다. 

“강씨종자 양반이라고 뭐 하나 반듯하게 살아온 것도 없는데 무슨 양반이 어쩌고. 아유 참나.”

확실히 양가는 차이가 있었다. (우리집안만 이야기해보자면) 강가에는 이상주의자 또는 망상 주의자들이 꽤 있었다. 과감하고 무모했다. 호시절에야 호인이라 불렸겠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 했다가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라. 실속이 부족했다.

김가는 지키기, 굳히기에 능했다. 손해 보거나 아쉬운 소리 듣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엄마는 대인관계에서 가혹하리만큼 호혜성을 따졌다. 호혜 원칙을 지키는 자에게는 존경과 예를 표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와는 최소한의 관계만을 남겨두고 교류하지 않았다.

익선동 고모할머니가 동대문 일대의 ‘큰 손’으로 활동한 점이나, 고모부 할아버지가 경기 중북부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버스 노선을 운영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김가는 조선 후기 4대문을 드나들며 이문을 남기고 정보를 공유하던 중인 계급이 아니었나 싶다.

단적으로, 내가 큰 장난을 칠 판이면 외할머니나 고모할머니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아서, 경쳐!!!"
“할머니! 경치는 게 뭐예요?”
“혼나는 거지! 큰일나 하지마!”

사실 ‘경을 친다’는 말은 실제로 경을 치는데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시대에 종이나 쇠북을 쳐서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데, 밤이 되면 일경, 이경 이런 식으로 5경으로 나누어 통금과 해제 시간을 알린다. 우리가 요즘 말로 ‘어디서 몇 시경에 보지 뭐~’ 하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통금 위반자인데, 이들은 경범죄자로 취급되어 호패를 압수당한다. 그렇다고 딱히 곤장을 맞을 정도의 형벌 감은 아닌지라, 순포막의 포졸들은 자신이 불침번을 서는 동안 걸린 자들에게 대신 경을 치도록 하는 벌을 주고 날이 밝으면 훈방 조치해준다. 그렇게 벌을 서고 돌아온 ‘불순한’ 자들로 인해 마을에서는 ‘저 경을 칠 놈’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지금은 퇴직하신 운현초교 모 교장 선생님 말에 따르면,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사람들 중에 유독 우리 엄마만이 교무실까지 찾아와서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고 갔다 한다. 그리고 며칠 후 어느 학부모가 입학 취소를 신청하여 공석이 생긴 찰나, 그때 펑펑 우신 어머니 생각이 나 우리 집에 전화를 거니 엄마가 번개같이 달려와서는 입학 등록을 하더라는 것이다.

어험 이를 어쩌나 하고 뒷짐 지고 돌아설 양반이 아니다. 찌를 담그려면 한 줌의 눈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우리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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