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로 떠다니는 말들의 의미
설거지는 대체로 아껴둔다. 주방은 정돈이 인테리어지, 라며 정돈을 미덕으로 삼던 나는 설거지가 나오는 대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이랬던 내가 지금은, 냄새가 심하지 않는 한 조금은 묵혀둘 정도가 됐다. 살림은 장비빨이라는 말에 기대어 웬만한 살림은 가전의 도입으로 자동화 시스템을 이루었건만, 신세계라 일컫는 식세기의 도입은 아직 예정에 없다. 일관성 없는 ‘살림 보존구역’이랄까. 정통 그대로의 설거지를 고수하며 미덕 없는 싱크대를 유지한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아껴둔다’는 표현을 쓰겠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아껴둔다’ 말하는 이유는, 당장 해치워야 할 이유보다 나중에 쓰일 이유가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 따위?를 아껴 어따 쓸 일인가 싶지만, 의외의 쓰임새로 알뜰하게 산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알뜰하기로는 비할 데가 없다.
내 글을 본 친구는 단번에 쓴 느낌이라고 했다. 6박 7일은 족히 걸릴 것 같은 글을 빠르게도 쓴다며 말했다. 대체로 모니터 앞에서 소요하는 시간은 빠른 편인 것도 같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이 글이 되어 나오기까진 한 달 이상은 걸리는 듯하다. 몇 년 이상을 담아두기도 한다. 글을 쓰기로 하기 전엔,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이 갈 곳 잃은 아이들처럼 바람 없는 날의 비눗방울 같았다. 설거지를 하다가, 운전을 하다가, 빵을 씹다가 하나씩 떠오르는 오색 비눗방울 같은 아이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채로 살았다. 끝날 줄 모르는 수능 금지곡처럼 흥얼흥얼 띄웠다.
머리 위에서 문장들이 띠롱띠롱 나타나는 경험이 있으신가. 타닥타닥 껌뻑이는 커서 따라 누군가 써준 듯한 글들이 떠다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으신가. 당장 써야 할 보고서의 첫 문장이라거나, 학교에 전화 걸 때의 첫인사 말이라거나, 블로그에 쓰고 싶었던 기가 막힌 문장이라거나. 모니터 앞에서는 당최 떠오르지 않던 문장들이 술술 나오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머리 위에서 오래도록 맴돌다가 지겨울 정도가 되어서야 글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맴돌던 말들이 제 갈 길을 찾아 퐁퐁퐁 사라졌다.
쓰는 인간이 됐다. 그렇게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향해 외치는 말인지 생각할 겨를 없이 떠오르는 대로 받아 적는 것부터 시작했다. 정처 없이 떠다니는 말들이 아우성거릴 때가 되어서야 겨우 글로 남길 수 있었다. 남기지 못하면 다시 떠올라 빙빙 맴돌기를 반복했다.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써야 했다. 일상의 부분을 쓰는 일에 나눠 쓰는 인간이 됐고, 기꺼이 그러마고 타일렀다.
읽는 이가 없는 시대에 쓰는 이가 된다는 건, 혼자 쓰고 끝날 일인 줄을 알면서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를 향해 그렇게 외쳐대고 싶었는지 틈만 나면 껌뻑이는 커서 따라 떠다니는 말들을 주어 담았다.
쓰다 보니 잘 쓰고 싶었고, 잘 쓰려면 많이 읽으면 된다 해서 하염없이 읽었다. 읽다 보니 떠오르던 말들이 사라졌다. 터져 나오던 생각들이 조용해졌다. 읽지도 쓰지도 않게 되었다. 무념무상의 시간을 보냈다. 그것으로 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눗방울 같은 생각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아이를 태우고 오고 가는 길에 운전대만 잡으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멍석을 깔고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자 생각했다. 책상을 준비하고, 아이가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춰 쓸 수 있게 준비했다. 이제 다 털어놔 보자고 멍석을 주단처럼 깔았다. 멍석은 함부로 까는 게 아니다. 마음을 먹고 나면 되던 것도 안 되는 게 맞다. 껌뻑이는 커서는 좀처럼 나아갈 줄을 몰랐고, 쓰고 싶은 말들은 운전할 때만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서울에선 꺼낼 일 없던 장롱 면허가 시골에 오자 자유를 얻었다. 부지런히 운전하며 살았다. 아이의 일로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워싱턴야자는 노을빛을 받으며 아름다운 친구가 되었다. 야자수 길만 달리면 할 말이 많아지는 이유는 대나무 숲에 외쳐대는 누군가의 심정과도 같을지 모르겠다. 운전은 힘든 날의 위로가 되었고, 답답한 일상의 창구가 되었다. 내가! 지금 내가! 할 말이 있다고! 외치게 했다. 아이를 태우고 오가는 길이 서울의 그것보다 찬란해서, 많이도 울었고 그렇게 시간을 견뎠다.
감각으로 얻는 이미지는 연상하는 일의 재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주워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스티븐 스필버그 또한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아이디어를 줍줍 했다더라. 자동차 운전 외에 샤워나 수영, 걸레질, 뜨개질, 설거지 등은 모두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인데, 이런 행동이 논리적 두뇌를 좀 더 창의적인 두뇌로 바꿔준다고 한다. 무엇이든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건드려보는 행위는 창조적 충동을 불러일으킨단다. 이 말을 듣게 된 후부터 설거지를 대하던 마음이 달라졌다. 식기세척기를 굳이 살 이유가 없어졌다. 이왕이면 뜨개질을 해볼까 싶기도 했다. 이래서 오감 오감 하는가 보다 싶었다. 운전할 때마다 내 머릿속이 그랬던 이유가 그게 이래서 그랬던가 보다.
쓰는 인간이 됐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기어이 써 주기로 했고, 내 속이 원하는 일이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주마고 어르고 달랬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설거지의 다른 쓰임이었다. 쓰지 못할 때마다 달려 나가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대안이 된 것이 설거지였다. 운전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글 쓰기가 멈출 때마다 설거지는 특효약이 됐다.
쓰는 일은 내 삶 위로 드론을 띄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답답한 일들의 실마리를 찾을 때, 원망스러운 마음을 달랠 때, 세상이 왜 이러냐고 하소연을 할 때, 머뭇거리게 되는 말 대신 글을 쓰며 자유로워진다. 이까짓 글따위를 써서 어따 쓸 일인가 싶은 날들도 찾아오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쓰는 일이란 다 쓰고 난 후의 ‘글 자체’보다, 쓰는 동안의 행위에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걸. 글을 쓰는 동안 한껏 자유로웠다가 설거지로 마무리를 하는 날엔 간단한 성취감까지 누릴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난 글을 쓰며 설거지를 한다.
쓰는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 조금 맛을 본 바로는 삶을 레가토처럼 꾹꾹 눌러 사는 기분이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일단 고잉. 궁금해서라도 고잉.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나는 씁니다. - 롤랑 바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