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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Sep 08. 2021

내 안에 완벽주의가 있다

아이의 장애를 실수라 여겼던 마음


내 안에 완벽주의가 있다. 내 안에 하늘과 숲과 그대를 담았으면 좋았으련만, ‘완벽’이라는 애를 담고 살았다. 대충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무어라도 돋보이고 싶은 마음을 더해 만드는 자기 고문적 시스템은 가히 가학적이다. 고문스러울 정도의 노력으로 만든 완벽이라는 애는 어찌나 고약한지, 얼렁뚱땅 만든 누구의 것보다 완벽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일러주지 않더라.



완벽이라는 기준은 스스로 만든 것이기에 내 기준에 완벽하다 해서 다른 이의 기준에 완벽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 걸 모르고 살았다. 내 안에 사는 완벽이라는 애만 만족시키면 된다 믿었다. 즐기는 이와의 경쟁? 그 정도는 져줄 수 있지, 라며 온갖 쿨한 척은 다하면서 또다시 완벽을 향했다. 나도 모르게 급성장해버린 ‘완벽’이라는 아이는 이렇게나 지독해서 내 인생까지 쥐락펴락 하리란 걸, 그땐 몰랐다.



예쁘게 살고 싶었다. 광고에 나오는 깔끔하게 정돈된 삶을 살고 싶었다. 매끈하게 잘린 과자 봉지처럼 단정하고 보기 좋게만 살 수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아지는 광고처럼 내 삶도 마냥 좋은 것이 될 것이었다. 차곡차곡 예쁘게 예쁘게 쌓아가고 싶었다. 아이에게도 예쁘게 만들어보자, 예쁘게 말해야지, 예쁘게 인사해야지, 예쁘게 입고 가자,라고 말했다. 더러운 건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은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가위질을 도와달랬다. 종이 인형을 경계선에 맞게 자르지 못하겠다고 했다. 보기엔 너무나 잘 자른 것만 같은데, 2밀리의 오차를 아쉬워하며 반듯하게 잘라달라는 아이를 보니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로 광고로 완벽한 상품들로, 기계적 완벽에 둘러 쌓인 아이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아이가 되었다. “찬이야, 우린 사람이야, 기계가 아니야, 이 정도면 엄청 잘 자른 거야. 너무 훌륭한 걸~” 액션 가면을 쓰고 아무리 액티브하게 이야기를 해봐도 높아질 때로 높아진 아이의 눈엔 자신이 자른 인형이 성에 차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완벽하게 자르기 전엔 인형 놀이는 시작도 못할 터였다.



완벽은 세세한 것에 집착하게 한다. 이 작은 완벽을 위해 정작 하려던 놀이를 못하게 되는 미궁으로 빠지게 한다. 그날, 찬이는 인형 놀이를 결국 하지 못했다. 예쁘게 잘린 완벽한 종이 인형을 보고 싶어 할 뿐이었다. 보기만 해도 즐거운 일에 둘러 쌓인 아이는 놀면 더 즐거울 일을 두고도, 보는 일 만으로 즐거움을 찾는 아이가 되었다. 눈앞의 놀잇감을 두고 엉뚱하게 전전긍긍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 내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알게 됐다. 아이의 장애를 실수라 여겼던 내 마음을 마주하게 됐다. 쓰던 문장이 완벽하기 전에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며,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곱씹어보는 일을 반복했다. 실수를 자연스럽게 흘러 보내는 여유를 가지고 나서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하려던 이야기를 다 쓰고 난 뒤에 눈에 띄는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걸 배웠다. 과정 속에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가는 중이다.



글을 쓰는 일에 끝이란 없다. 고치고 또 고쳐도 끝없이 고쳐 쓸 수 있는 일이 글쓰기다. 어떤 시점에서 매듭을 짓고 다음으로 넘어갈 뿐이다. 하물며, 사람 사는 일에 실수란 없을 수가 없는 것인데, 실수 없이 살고 싶었다. 실수만 보면 한없이 고쳐보려다 즐기기도 전에 끝이 났다. 살고 싶은 내 인생을 먼저 살아야 한다. 그래야 돌아보며 발견하는 실수들에 토닥일 마음이 남는다. 그래야, 즐겁다.



완벽을 향해 가던 내 인생에 오점이 생겼다고 여겼다.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진 길을 제대로 돌려놓고 완벽한 내 인생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하는 만큼 아이는 성장해줄 거라는 확신과 믿음은 (내 기준에) 완벽한 아이를 만드는 데 몰두하게 했고, 그 일에 10년을 썼다. 세상 속에 봐 왔던 이상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기준 삼아 그 기준을 향해 가는 길이 맞다고 믿었다. 옆 집 아이만 보며 키운 어머님 시절에 비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보며 키워지는 내 아이가 얼마나 불행할지를 보지 못했다.



아동 발달 검사에 따르면 몇 개월엔 이것을, 몇 개월엔 이것을 해야 한다고 한다. 포테이지 발달 검사에 따르면 이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다음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한다. 사회성 발달 검사에 따르면 이 나이에 이 걸 하지 못하면 사회 부적응자가 될 터이니 유의하라고 잔뜩 겁을 준다. 지능 검사에 따르면  이 정도는 해야 정상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어머님, 이 기준에 맞춰 키우셔야 합니다.’라며 세상은 나에게 길을 열었다. 이 길로 가야 맞다고 말이다.



발끝에 걸려 넘어지는 작은 계단 하나에 전전긍긍했다. 저 멀리 계단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실수라 말하는 세상의 기준 앞에 무너지는 나 자신이 두려워서 마냥 걸었다. 실수는 적당히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못했다. 실수와 친해질 수 있다는 것도, 실수를 자연스레 대하는 법도 몰랐다. 아이의 장애를 최선을 다해 고쳐낸 뒤, 수긍할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다시 돌아가, 가려던 길을 예쁘게 걷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것이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몰랐다.





돌아보면 아이를 위한다 했던 일들이 참으로 사소하다. 그땐 분명 어마어마했던 일들이 슬쩍 돌아보기만 해도 사소하다. 이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이 걸 놓쳤을까 싶은 일들에 온 힘을 다했다. 가위질을 하려면 손가락 힘이 있어야 하고, 가위질 이전에 젓가락질을 해야 하고, 젓가락질을 하려면 상지근육의 힘이 있어야 하고, 상지근육의 발달을 위해선 기는 단계를 충분히 가져야 한댔다.


문제라 여기면 문제만 보인다. 완벽은 이 ‘문제’라는 친구를 데리고 온다. 인생을 상지근육 발달이라는 문제 풀이를 하듯 살게 된단 말이다. 눈앞에 즐거운 일을 두고도 상지근육만을 붙들고 사는 꼴이다. 상지근육 말고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보지를 못한다. 상지근육만 보이니까 상지근육이 제일 재밌다.



줄리아 카메론은 <아티스트 웨이>에서 완벽주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완벽주의는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얽매여 꼼짝 못 하게 만들고 전체를 보는 안목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올가미이며 강박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이다.” 완벽하게 끝내려는 마음이 오히려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세부적인 것만을 보게 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아그리파인지 줄리앙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은, 데생하듯 윤곽 먼저 그릴 순 없다. 살아봐야 전체가 보인다. 볼테르의 수염을 몰리에르의 것인 줄 알고 하염없이 그리다 끝이 나는 인생보다는, ‘볼테르의 수염이었군!’ 나중에라도 알게 되는 인생이 의미 담기에 좋지 않을까.


아이의 장애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고, 아이와 함께 혹은 따로 즐기며 인생을 넓게 보라고, 나를 향해 쓴다. 수염만 파다가 바로 위 코는 못 보는 ‘완벽’이라는 애를 이제 용서할 때다.


내 인생에 만난, 아이의 장애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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