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에 휘둘리지 말고 휘두르며 살아요. 휘뚜루마뚜루~
살림에 휘둘리지 말고, 살림을 휘두르며 살았으면 좋겠다. 정은이 알려둔 마법을 마구 휘두르며 살고 싶다.
볼 때마다 여유로웠다. 책을 읽더라도 필사적으로 읽는 나와는 달랐고, 휴대폰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정보의 바다를 훑어내며 망망대해를 숨 가쁘게 헤엄치는 나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보라색으로 할지 소라색으로 할지를 고민하는, 깊이 자체가 다른 낯빛이었다. 앉은자리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향기가 눈에 보이는 사람이었다. 진한 코랄 빛의 탱글한 꽃몽우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띄엄띄엄 아는 자에게만 보인다는 허상이겠거니, 남들에게만 보인다는 '여유'라는 이름의 허울이겠거니 생각했다. 아이가 없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고, 아이 따라 온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 정도를 두었을거라 짐작했다.
후에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은 정은이라 했다. 서른 중반으로 보았던 나이도 마흔둘을 넘겼고, 함께 온 셋째 아이 위로 둘이 더 있다 했다. 동네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고 했다. 핸드메이드 소품샵이라며 한 번 놀러 오라 말하는 정은의 얼굴은 말끔했다. 기다리는 엄마들이 늘 그렇듯, 기다리고 기다리다 한 마디의 말을 트고, 두 마디의 말을 트며 조금씩 친해졌다. 손으로 만드는 비슷한 취미가 있음을 발견한 뒤론 가까워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정은의 가게는 시내 구시가지 한 복판에 있는 오래된 주택가에 있었다. 가게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비탈진 언덕배기 중턱에 나무로 만든 작은 현판을 단 가게였다. 그냥 지나쳐도 괜찮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가게였다. 가게는 주인을 닮았는지 아담하고 단정했다. 손님 치례를 하려는 정은이 들어서는 나를 보며 창가 옆 의자에 잠시 앉아 있으라고 일러두고는 돌아서더니 금세 돌아왔다. 내 눈이 먼저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둘러보느라 정신을 놓은 사이, 정은이 차를 내왔다. 레몬을 얇게 썰어 올린 따뜻한 레몬차였다.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면 뭐든 좋아한다며 마음이 담긴 물건들을 소중하게 파는 꿈을 갖고 있다고 했다. 누구나 이곳에서 좋은 마음을 사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물건 구경에 가게 구경에, 마음까지 무언가 예쁘게 포장이 되는 기분을 느끼고 나니 욕심이 났다. ‘나도 내 시간을 만들고 싶다.’
점심까지 먹고 가라며, 어차피 점심시간엔 손님이 없다고, 가게 안에서 간단히 차려 먹자는 정은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간이 조리대가 있다는 커튼 뒤를 가리키는 정은을 바라보며, 염치 불구하고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정은은 이미 자리를 떴다.
가게에서는 웬만해선 냄새나는 음식은 하지 않는데, 오늘 딸아이가 멸치 볶음이 먹고 싶다길래 마침 하려던 참이라 했다.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이 언제 볶았는지 순식간에 멸치볶음 냄새가 난다. 쪼갠 아몬드, 깨소금, 쪽파를 후뚜루마뚜루 섞어 마법을 부려 내온 멸치 반찬이 올려졌다. 저 아몬드는 언제 쪼갠 걸까, 추측하기 바쁜 내 눈 앞에 정은은 뚝배기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뚝배기 비빔밥이다. 이게 머선 일인가. 채 썬 오이와 당근, 표고버섯과 상추가 둥글게 둥글게 모인 가운데, 반숙 프라이가 얹어져 있는 모양이 여기가 식당인가 싶다. 계란 프라이 아래에는 친정 엄마가 만들어준 고기장이 있다고 했다. 어서 비비란다.
살림은 보통 장비빨이라던데, 정은의 마법은 무시할 수가 없다. 대체 어느 순간에 이 음식들이 나올 수가 있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정은의 마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은의 살림을 보니 나는 살림에 휘둘리며 살고 있었다. 정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법을 습득한 생활의 달인이었다. 하고 싶은 가게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터득하게 된 살림의 비법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정은의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정은은, 시간을 내서 하는 청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틈틈이 하는 게 살림이 되면, 말할 수 없이 쉬워지는 게 살림이라 했다. 화장실 간 김에 머리카락을 줍고, 손 씻은 김에 만들어둔 소다수 물티슈로 세면대와 수전을 한번 훑어주며, 때 타지 않은 빨래는 조물조물 손빨래가 훨씬 간단하다는 것이 정은의 비법 아닌 비법이라 했다.
하루 중 청소시간을 따로 내서 하기보다 빨래를 널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동선을 따라 물건을 정리하고 닦는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매일의 청소가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수학 문제지 한 장을 풀어야 하는 마음보다, 두 개의 문제만 먼저 풀어보자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건, 표가 나지 않을 일은 과감히 포기한다는 거였다. 매일 쓸고 닦아도 알아주는 이 없는 게 살림이며, 스스로가 용납할 정도의 놓아둠이 필요하다 했다. 적당히 먼지도 마시고 그래야, 사람 사는 일이 된다고 했다.
정은의 가게를 다녀온 날부터 틈새 시간을 공략해보기로 했다. 틈새 시간, 틈새 동선을 따라 집안일을 하기로 했다. 동선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하고, 장비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투자하기로 했다. 빨래 바구니가 어디에 있어야 4인 가족의 빨래를 세탁하기에 적합할지를 고민하고, 아이들 스스로 정리할 수 있으려면 어디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은가를 고민했다. 매일 쌓이는 먼지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으려면 어떤 물건의 진열을 줄여야 하는지 고민했다. 탁자 위에 두는 것보다 벽에 걸어 진열하는 방법이 보기에도 좋고 손이 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 시간이 꼬박 걸리던 매일의 청소가 이제는 단 15분이면 끝이 난다. 한 시간 동안 하다 보면 마음까지 울적해지던 일이 단 15분 안에 끝나니 울적할 시간이 없다.
요즘은 효율적인 식탁 차리기 비법을 고민 중이다. 유튜브로 검색을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암만 물어본들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는 살림의 리듬만 못하다. 그래서 가끔 정은의 식탁으로 놀러를 간다. 정은이 말로 전해주는 것보다 정은의 식탁이 차려지는 순간의 몸과 손의 놀림을 바라보는 것이 더 훌륭한 배움이 되기 때문이다.
4인 가족의 저녁 식탁을 차리는 일은 꽤나 품이 드는 일이기에 제대로 차리려면 종일 시간을 내어도 모자라나는 게 식탁의 일이다.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저녁 식사를 차리는 시간이 두 시간이나 걸리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고 진수성찬을 차리는 것도 아닌데, 점점 나에겐 저녁 식탁이 부담이 되어 갔다.
이제는 단 30분이면 넉넉하게 차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시간을 줄인 만큼 마음의 피로도 줄었다. 모두가 원하는 살림은 투자 대비 효율이겠다. 적은 시간으로 영양가 높고 맛있는 음식을 낼 수 있는 엄마들의 로망은 끝이 없을 테다. 엄마들은 시간을 벌어 자신을 위해 쓰고 싶어 하는 존재니까.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으니까. 그래야 뭐라도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니까.
가끔은 배달 음식의 힘을 빌리기도 하며, 나의 시간을 충전한다. 그 시간을 벌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정은이 그랬던 것처럼. 정은에게서 나오는 '여유'의 향기까지는 부리지는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쁜 마음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정은처럼 살림의 마법을 전수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났으면 좋겠다. 살림에 휘둘리지 말고, 살림을 휘두르며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