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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Apr 25. 2021

잘 기다리는 법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흔한 말에 기대어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내 시간을 기다리는 일로 채워야 하는 건, 꽤나 어렵다. 인정 욕구도, 성취감도, 경제적 문제도 쉬이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기다릴 줄 알아야 아이의 성장도 따라온다. 잘 기다리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엄마! 이 게 무슨 냄새예요?"

응? 정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훅 들어오는 고소하고 달콤한 이 냄새는? 아! 요리 활동했구나! 고소한 버터향이 나는 걸 보니, 베이킹을 했나 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코너를 돌아 와다다다 달려간다. 달콤한 향기는 찬이가 이곳을 좋아하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요리 활동을 하는 이 곳에 찬이는 작업 치료를 하러 온다. 젓가락 연습이 지겨워도, 가위로 자르기 연습이 지겨워도 이 곳이 지겹지 않은 이유는 옆교실의 요리활동 때문이다. 초콜릿 냄새가 나고, 알록달록 볼거리가 많고, 갖고 싶은 걸 만들어서 가지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찬이도 여러 해동안 요리 활동을 했다. 요리가 뭐예요, 라던 찬이도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됐고, 이 곳을 좋아하게 됐다. 작업 치료가 하기 싫은 날도 이 곳에 오는 것만은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또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요리 활동을 막 끝낸 동생이 만든 걸 한 봉지 주고 간다. 초코 머핀을 만들었네. 알록달록 초코볼과 스프링클이 가득 뿌려진 초코 머핀을 보니 기분이 좋다.



아이를 따라 수년을 따라다녔던 치료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단연 여기다. 찬이와 시분을 다투며 여러 치료실을 오가다가도 이곳만 오면 마음이 편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가 않았다. 엄마부터 이런 마음이 들다 보니, 찬이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보통 치료실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난 뒤, 복도에 남아 있는 엄마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본다. 길다면 긴 시간일 수 있지만 뚝뚝 끊어지는 호흡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무언가에 집중하기는 어렵다.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휴대폰을 본다. 표정도 비슷한 걸 보면, 기분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수년을 반복하며 지내다 보면 내 표정도 별 수 없음을 느끼곤 하는데, 해준이 엄마를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같은 시간이라도 다른 마음으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해준이 엄마를 처음 본 건 찬이가 여섯 살 때였다. 해준이 형은 찬이보다 세 살이 많다.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이곳에서 해준이 엄마는 늘 한 구석 창가에 앉아 있곤 했다. 볼 때마다 늘 곁에 책이 있었다. 아이들을 대동한 사람들이 오가는 터라 시끄럽고 번잡하기 일쑤인 이 공간에서 어떻게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시간 때우기겠거니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국어 선생님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편견은 굳이 갖고 싶지 않지만, 국어 선생님이었다는 걸 알게 된 뒤론, 그래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 말았다. 나에겐 없을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고사리 장마가 시작되던 습기 많은 봄날이었다. 5월을 향해 가는 날씨가 그렇듯, 그날도 더운 기운이 훅 끼쳐오는 날이었다. 날씨 탓에 기분마저 별로인 마당에, 찬이와 치료실을 다니기가 끈적끈적 영 별로다. 날씨 탓을 하게 되는 돌봄의 일은 무엇으로 무드를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기조차 쉽지 않다. 찬이의 목둘레로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들어오는데 해준 엄마가 있었다. 꿉꿉한 습기와 함께 들어오는 내 주변의 공기와는 달리, 해준 엄마 주변엔 싱글싱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해준 엄마는 해준이를 마흔에 낳았다고 했다. 해준이가 태어난 후로 자연스레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고. 상세불명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진단명을 얻기까지, 상세 분명한 원인을 알기 위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검사를 하느라 해준이를 기다리는 일이 많았단다. 아기 해준이 등에 바늘이 꽂힐 땐 엄마 등에도 바늘이 똑같이 꽂히는 것 같았고, 해준이가 MRI 촬영실에 들어갈 땐 마음이 먼저 해준이와 함께 들어갔다고 했다. 해준이가 중환자실에서 24시간을 보낼 땐 병원 복도를 떠날 수가 없어 24시간을 꼬박 기다리기도 했다는 해준 엄마의 기다리는 일은 해준이가 커가면서 계속됐다. 수년을 이어가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책을 읽고 있더란다. 책을 읽다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변에 나누게 됐다고 했다. 그러다 요리 활동 제안도 하게 됐다고 한다.


같은 시간을 기다려도 해준 엄마와 나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와 찬이는 지루하게 보낼 뻔한 시간을 행복한 추억으로 메우게 된 거였다. 운이 좋았다.



책을 습관처럼 들고 다니기까지 오래 걸렸다. 살아내느라 마음이 어지럽고, 손이 떨리고, 눈까지 어지러운 마당에 책이  말이냐 싶었다. 학교든 병원이든 치료실이든 호흡이 짧은 기다림 속에 책을 곁에 두는 호사스럽기만 . 눈에 글자를 담는다는 것이 내가   있는 종류의 일이 니었. 치료실 안의 아이가 어떤 자세로 있겠구나, 상상하며 아이가 들어간 장소에 이미  마음은 유체이탈 상태인데, 책이  말인가. 당장 아이에게 필요한 교재를 서핑하는 일이 중요했다. 하루 동안 아이가 해야  일에 마음 급한 엄마에게 책이란 실용서가 최선일 수밖에 없다. 초분을 다투며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초등 입학에 필요한 것이 뭔지, 엄마들의 입담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했다. 그 게  살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했.



김연수 작가님의 <소설가의 >이라는 책을 읽었다.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할지 자기 계발서를 뒤적거리며 묻던 내게 <소설가의 >, 인생에 대해 물을 거라면 소설가에게 물으라 했다. 소설 속에 인생의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내가 묻는 질문의 답은 분명 소설 속에 있을 거라고 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 인생을 사는 게 쉽지 않듯이. 나만의 시야만으로, 일인칭 시점만으로 바라보기에 이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관점이 얽혀 있다. 대부분의 관점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상관없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믿는 바를 곧장 행하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시선이다. 그것마저도 무시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의 일들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으로 틀리는 일이 없이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재해석된다.
혼자 읽을 게 아니라면, 소설을 쓸 때는 일인칭과 이인칭과 삼인칭을 모두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앞으로 오백 년은 더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




책으로 위로받고, 책으로 수련하며, 책으로 길을 찾는다는 해준 엄마의 말이 이제는 나의 말이 되었다. 따분한 사람일 거라 짐작했던 해준 엄마가  기다리는 법을 전수해준 덕에 이제는 나도  기다리기 위해 책을 읽는다. 따분한 사람일 거라며 지나쳤던 해준 엄마를 이제는 다르게 기억한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따분하다 생각하겠지. 그렇더라도  속에서 방법을 찾으며 기다리기로 한다.



집중하지 뭇했 시간들이 달라지고 있다. 책이 어떤 말을 해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허구를 쓸데없는 이야기로 여겼던 내가 이야기의 재미를 알게 됐. 책은 재미로만 읽는  아니라, 소설 속에서 내가 사는 세상을 비춰 본다. 나와 찬이는 어디쯤인지 가늠하면서. 렇게 읽다 보면  비교하던 마음도 사라지고 내가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하게 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흔한 말에 기대어 오늘도 기다리며 책을 집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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