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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May 20. 2020

아줌마에게 낭만이란

의욕을 부르는 낭만이라는 마법




“자~ 아저씨가 선물상자까지 가는 거야~ 자~ 출발!”




이제 막 미로 찾기를 시작한 열두 살 찬이에게 일러두는 말입니다. 선 하나만 찍 그으면 끝이 날 이 어마어마한 미로를, 찬이는 3분 동안 지날 참이기 때문입니다. 1초면 될 일을 3분을 하려니 숨이 넘어갑니다. 내 맘이 얼마나 비장했는지 너님이 알까요.



졸라맨 아저씨를 손으로 짚으며 찬이가 말을 합니다.

“엄마! 이건 나예요. 선물을 찾으러 가고 있어요. 내가 선물을 잃어버렸거든요. 이 선물은 무슨 선물일까. 선물은~ 내 생일 때 받은 장난감이에요. 주방놀이 세트!..."



한숨이 자동 발사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찬이의 입담? 덕에 엄마의 날숨은 배가 되었습니다. 말이 한참 늦은 찬이를 위해 쉴 새 없이 건넸던 엄마의 레퍼토리가 이젠 찬이 입에서 나옵니다. 이왕이면 재밌는 얘기를 해줄 걸 그랬습니다. 후회가 막심합니다만, 그 엄마의 그 아들일 뿐입니다.



말은 멈추고 그냥 선 하나만 그어주면 안 되겠냐는 말에, 곧 죽어도 선물 상자를 찾으러 가는 거라며 부득 눈물까지 흘립니다. 한두 번이면 끝날 줄 알았던 상상의 여행 놀이가 뭔가를 할 때마다 떠나는 여행이 되고 보니, 현실을 살아야 하는 엄마는 미칠 지경이네요.



연필 잡기를 싫어하는 찬이는 이번에도 역시나 미로 여행을 떠날 참입니다. 1초의 순간도 재밌게 건너야 연필 잡은 손이 싫은 마음을 이겨낼 수 있거든요.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는 마법'을 이 녀석은 이미 알고 있네요. 기어이 3분을 채워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하려 하는 마음을 만들려고 이다지도 열심인데, 난 뭐가 그리 지겹다고 어리광인 걸까요. 일상의 낭만을 잃어가는 아줌마에겐 찬이의 상상 놀이가 힘들기만 합니다.



소박한 그릇 하나에도 설레던 호시절엔 뱃속 찬이만으로 꿈을 꾸듯 낭만을 안고 살았습니다. 태어날 찬이를 위한 준비라면 무어라도 낭만이 가득했달까요. 하기 싫은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꿈이 있었습니다. 낭만이 가득했죠.



그렇게 꿈을 꾸듯 신혼을 보내고 나니 찬이라는 일상이 떨어졌습니다.



십여 년 동안 일상을 무식하게 반복하며 살았더니 낭만을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아슬하게 채워뒀던 나의 낭만은 이제 바닥을 보이네요.


찬이가 연필 잡는 마음이 딱 이런 기분일까요. 선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마음을 상상하듯, 어쩌면 내 마음에도 낭만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만으로 하기 싫은 미로 찾기를 기꺼이 해내는 찬이를 보니, 나의 낭만여행은 참 오래되었다 싶네요.


마음으로라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낭만을 다시 채워줄 마음의 여행을요.




이미지 출처 : pinterest


살림하는 주부는 주방의 근사한 광고에 홀리듯 물건을 사는 날이면, 잠깐이지만 기분이 좋아져요. 주문한 물건에 낭만까지 넣어 주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근사하게 디스플레이된 찻잔 세트를 보며 나의 삶도 근사해질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인테리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상상을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보며 나의 삶에도 기분 좋은 낭만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기념하던 요전 날엔, 소박한 꽃을 들고 온 남편이 그렇게 기쁘더라고요. 꽃을 좋아할 나이가 돼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잃어버린 낭만을 채워줘서 고마웠던 거였어요. 주책맞은 눈물까지 난 걸요.


그러고 보면 매년 돌아오는 기념일을 챙기는 이유도 잃어가는 낭만이라는 탱크에 기름을 채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을 버티는 낭만이라는 마법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날인 거죠.



간간히 글을 쓰는 일도 일종의 낭만과 같아서 작가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이미 부른 돼지의 몸뚱이를 가졌지만, 타닥타닥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금세 낭만이 채워지곤 해요. 눈은 가리고 타자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만은 늘 고픈 소크라테스가 됩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있노라면 세상 귀한 존재까지 된 기분이 드니, 이보다 더 행복한 시간은 없습니다.



낭만은 마음을 우아하게 합니다. 먹기 나름이라는 마음은 하고자 하는 대로 변신도 가능합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도 낭만이라는 실드를 둘러치면 사뿐 거리는 발걸음을 장착할 수 있게 되죠. 초라한 두 손보다 살랑 거리는 머리칼이 더 생생 해지는 마법을 발휘합니다. 기분 좋은 미소는 덤이죠.



나름의 낭만을 채운 주방에선 결코 꿈꾸는 요리가 나오진 않지만, 적당히 둘러친 낭만의 마음으로 음식을 내어주면 아이들도 그 마음 따라 나의 요리를 좋아해 줍니다. 이 정도의 낭만 레벨을 가지려면 다루는 스킬이 꽤 쌓여야 하지만, 마음의 연습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낭만은 하게 합니다. 하게 하는 마음을 만들어 줍니다. 지친 마음에 기름칠을 해줘요. 움직이게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는 마법이 됩니다. 풀 세트로 장착을 하고 살아도 과하다 하지 않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난 낭만을 장착할 참입니다.



낭만 주부로, 개멋 잔뜩 부리며 살고 싶습니다.

상상 여행을 멈추지 않을 찬이와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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