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브지흐 첫날의 단상
프롤로그: 디지털 공간에서의 합창
올해는 유난히 시간의 매듭이 굵게 느껴지는 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 한반도가 광복을 맞은 지도 80년이 되는 해. 그리고 이곳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유노조 운동 ‘연대(Solidarność)’가 시작된 지 45주년이 되는, 저항과 희망의 기억이 교차하는 특별한 해였다. 우리는 이 묵직한 시간의 중첩 위에서 ‘자유’의 의미를 묻는 전시를 함께 만들기로 했다. 매년 열리던 ‘마인드 붐’ 축제의 첫 해외 전시이자, 해외 전시 경험이 많은 내가 전시감독으로 합류하며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폴란드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의 전시는 수개월 동안 디지털 유령처럼 존재했다. 작년 말, 첫 논의의 불씨를 지핀 이후, 올해 초부터 8개월 가까이 우리는 줌(Zoom)을 통해 함께 일했다. 그것은 시차를 넘나드는 새벽의 회의 속 픽셀로 뭉개진 얼굴들의 합창이었고, 새로운 제안과 긴급한 요청을 쉴 새 없이 밀어 올리는 왓스앱, 카카오톡 알림의 파장이었다. 예술감독의 감기로 급히 회의를 연기하고, 팔레스타인과 대만 출장 중인 나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캘린더 위에서 세계의 시간을 조각보처럼 깁던 나날들. ‘아티스트피를 조금이라도 늘려야 섭외가 원활할 것 같다’는 현실적인 고민과, 한정된 예산 안에서 최대한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야 하는 줄타기는 매일의 과제였다.
특히 전시의 얼굴이 될 포스터 시안을 두고 벌였던 지난한 논쟁은 이 디지털 협업의 축소판과 같았다. ‘사람 형상이 들어가면 메시지가 너무 한정된다’는 예술감독의 깊은 우려와, ‘사람이 빠지면 너무 비어 보인다’는 큐레이터의 현실적 감각 사이에서 우리는 전시의 정체성을 시각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디자이너에게 수정을 거듭 요청하는 미안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는 추상적인 에너지와 구체적인 인간 형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아 헤맸다. 네 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한데 묶어 역사의 변곡점을 조명할 특별 섹션의 제목을 ‘불복종의 연대기(Chronicles of Disobedience)’로 정한 것도 바로 이 치열한 논의의 과정 속에서였다. 전시감독으로서 나의 역할은 이 흩어진 목소리들을 하나의 화음으로 조율하고, 폴란드 파트너들의 더딘 회신에 대한 팀원들의 초조함을 다독이며, 보이지 않는 신뢰의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져지지 않는 데이터를 만지며, 실체가 없는 공간을 구획하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부: 우회하는 항로, 역사의 상흔을 건너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LOT 폴란드 항공 비행기는 몽골 상공에 이르자,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던 예전의 서북쪽 항로를 버리고 서남쪽으로 길게 기수를 돌렸다. 평시라면 당연했을, 시베리아 최단 거리로 관통하던 그 하늘길이 전쟁으로 인해 굳게 닫혀버린 것이다. 우리는 유목민의 역사처럼 아득한 카자흐스탄의 스텝과 실크로드의 메아리가 잠든 카스피해를 지나, 문명의 교차로였던 조지아 바투미 인근의 흑해 연안을 스쳐 터키까지 남하했다. 그제야 기수를 북쪽으로 꺾어 루마니아를 거쳐 폴란드로 향하는 13시간의 긴 순례. 이 여정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전시의 제목, «우리는 여전히 자유를 연습한다 (To the freedom, We Dance)»가 얼마나 위태로운 지정학적 현실 위에 서 있는지를 침묵으로, 그리고 육중한 연료 소모로 증언하고 있었다.
항로가 아제르바이잔 상공으로 접어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몇 해 전, 러시아의 미사일 요격 시스템에 격추되었던 말레이시아 민항기의 비극적인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사건으로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의 관계가 급속도로 틀어졌다는 뉴스를 기억했다. 예술은 국경을 초월한다지만, 그 여정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국경과 역사의 상흔에 의해 끊임없이 제약받는다. 이 비행 자체가 우리 전시의 첫 번째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2부: 차가운 공기, 따뜻한 재회, 그리고 새로운 길
브로츠와프 공항에 내리자, 30도를 웃돌던 서울의 폭염을 비웃듯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실레지아의 공기였다. 입국 심사대의 플래시 조명은 이방인의 얼굴을 잠시 희게 밝혔다. 곧이어 입국장을 나서는 우리를 익숙하고 따뜻한 미소들이 맞았다. 이번 전시를 공동으로 주관하는 주립 포토겐(Foto-gen) 갤러리의 파벨 큐레이터와 올가였다. 악수와 가벼운 포옹으로 수개월간의 디지털 소통이 마침내 현실의 온기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반가운 재회 뒤로 작은 소동이 있었다. 파벨, 올가와 인사를 나누고 한참을 기다려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김지후 씨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뒤늦게 나온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가방이 다른 사람의 것과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필연적인 소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곳 브로츠와프 공항은 수만 명에 달하는 LG 주재원들과 출장자들로 인해, 여행객보다 한국인 직장인으로 더 북적이는 곳이다. 낯선 폴란드의 도시에서 한국인의 얼굴과 언어가 이토록 자연스러운 풍경이라는 사실은 실레지아의 산업 지형이 한국의 글로벌 자본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다행히 항공사의 도움으로 가방을 잘못 가져간 분과 연락이 닿았고, 우리는 파벨이 준비한 밴에 올라 공항 주차장에서 그를 만나 무사히 트렁크를 교환할 수 있었다. 긴 여정의 끝에 찾아온 작은 해프닝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파벨은 그들의 포토겐 갤러리가 지금 대대적인 리모델링 중이라고 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반 위에 고딕 양식이 솟아오르고, 그 위를 소비에트 시대의 구조물이 덮고 있는, 그야말로 시간의 지층이 응축된 문화유산이었다. 더 멋지게 태어날 공간에 대한 기대를 나누는 그의 표정에서, 우리는 든든한 동료애를 확인했다.
그때 김신일 예술감독님이 주말 계획을 꺼냈다. 오늘, 금요일에 BWA 갤러리에서 크레이트 박스를 열어 작품 상태와 공간을 최종 점검하고 나면, 본격적인 설치가 시작되는 월요일 전까지 토요일과 일요일은 비어 있었다. 그는 그 시간을 활용해 베를린에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4시간 거리, 베타니엔의 큐레이터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전시 초청이었다. 예술 세계란 이렇듯 계획된 일정 사이로 스며드는 우연한 네트워크와 즉흥적인 제안들로 더욱 풍성해지는 법이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 제안은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다. 예술적 영감의 확장을 위해 김신일 예술감독과 김해다 큐레이터가 베를린으로 향하고, 나머지 팀원인 우리는 전시감독으로서의 마지막 점검에 집중하기 위해 주말 동안 파벨, 올가와 함께 이곳 발브지흐에 남아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둘러보기로 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 날아왔지만, 이렇게 각자의 여정으로 잠시 나뉘는 것 또한 협업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사실 공항에서부터 트렁크 가방을 끌고 나온 파벨과 올가를 보고 처음에는 조금 놀랐다. 우리와 함께 발브지흐에 머물며 모든 과정을 함께할 것이란다. 우리 호텔은 방이 꽉 차, 근처 다른 곳에 숙소를 잡았다고 했다. 우리를 위해 그들이 고민하며 준비했을 주말 답사 계획이 있는데, 팀원 모두가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깊은 배려와 헌신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전시란 탈색되고 소독된 화이트큐브에 새로운 것을 이동해서 넣는 행위가 아니라,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역사와 맥락에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또 다른 맥락들이 서로 만나 관계를 드러내고 일시적인 공동체가 되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전시감독으로서 기꺼이 주말 투어에 함께하기로 했다.
3부: 공간과의 대화, 비어있는 무대 위에 서다
우리는 호텔에 짐만 내려놓은 채, 우리보다 먼저 머나먼 길을 달려온 작품들이 기다리는 BWA 갤러리로 향했다. 옛 광산 시설(Stara Kopalnia)은 산업 시대의 붉은 벽돌 성채처럼 웅장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BWA라는 멋진 공간을 섭외한 것도 바로 파벨이었다. 한때 석탄을 캐내던 노동자들의 땀과 고단함이 서렸을 그 땅 위에, 이제는 예술이 새로운 사유의 갱도를 파고 있었다. BWA의 큐레이터인 표트르(Piotr)와 이로나(Ilona)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높은 천장은 묵직한 역사를 이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펼쳐질 새로운 담론을 품을 준비가 된 듯 너그러워 보였다.
공간을 살피던 내 눈에 도면과 다른 사선 가벽이 들어왔다. 원래는 철거 대상이었지만, 순간 나는 그 사선의 벽이 주는 가능성을 보았다. 전시감독으로서 현장에서 내리는 직관적인 판단은 때로 수개월의 계획을 뛰어넘는 생동감을 부여한다. 공간의 단조로움을 깨고 역동적인 시선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행히 나의 즉흥적인 제안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확인을 받았고, 공간은 우리의 대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개월간 모니터 속에서 평면으로 존재하던 전시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4부: 식탁 위의 연대, 밤의 사색
첫날의 마무리는 광산 단지 내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는 이 문화적인 행위 속에서도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맥락과 마주했다. 몽골-유럽 정벌의 대표적인 전투였던 수부타이 장군의 레그니차 전투가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말안장 안쪽에서 짓이겨졌던 날것의 타타르 스테이크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역사의 편린처럼 다가왔다. 문화의 만남이란 때로는 그처럼 야만적이고 파괴적이지만, 우리가 준비하는 전시처럼 평화로운 대화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 섞이고 부딪히며 경계는 희미해졌다가 다시 뚜렷해지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만두를 먹는 민족 중 가장 서쪽에 있다는 폴란드의 피에로기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뇨끼, 바삭한 닭고기 요리에서 우리는 이 땅의 복합적인 지형과 맥락을 다시 한번 체험했다.
체코 국경이 20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라는 사실은 코젤 생맥주의 맛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한국의 집에서 마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깊이가 느껴졌다. 둥그런 코젤 잔에 그려진 염소의 뿔 모양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민소연, 김지후 씨가 아이처럼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소한 것에서 유쾌한 이야기를 찾아내는 그들의 명랑함이 지친 여정의 활력이 되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화장실에 다녀온 김신일 감독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과거 광산 시절의 흔적을 보존한 것인지, 뻥 뚫린 금속판으로 된 기묘한 시설을 마주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아마도 과거 광산 시절의 유산인가 보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식당 자체가 살아있는 박물관 같았다. 바텐더가 분주히 움직이는 바의 아랫부분은 실제로 석탄을 나르던 궤도 차량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높은 천장은 육중한 화물을 옮기던 호이스트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리는 이렇듯 과거의 산업적 맥락 속에서 유쾌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그의 경험은 그럴듯한 발견처럼 여겨졌다. 그 ‘문화유산’에 대한 진지한 감상평이 끝나자, 호기심이 발동한 파벨이 확인을 위해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는 거의 쓰러질 듯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감독님이 마주했던 그 장소는 사실 손을 씻는 곳이었고, 진짜 소변기는 다음 방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공식적인 소통 끝에 마주 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국경과 언어를 넘어선 유쾌한 오해 덕분에 비로소 직책을 내려놓고 마음껏 웃으며 진짜 ‘개인’이 될 수 있었다.
에필로그: 밤의 산책, 그리고 서막
광산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마치고 지도를 보니 우리 호텔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아 소화도 시킬 겸 걷기로 했다. 길은 곧 자연 그대로의 숲과 수풀로 이어졌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어둠 속에 피어 있었다. 화려한 광산의 영광이 쇠퇴하며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의 외곽 풍경. 문득 우리의 강원도 사북, 정선이 떠올랐다. 코디네이터들은 야생화와 이름 모를 열매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모습을 보며, 50 언저리의 우리는 그들이 터뜨리는 감탄 자체에 또 감탄했다. 모든 것이 처음인 듯 세상을 받아들이는 20대의 생생한 감수성. 나이가 들며 무뎌지는 감각들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저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발브지흐 산자락의 바람은 한국의 늦가을처럼 차가웠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마음 한편에는 묵직한 책임감이 자리했다. 원래는 오늘, 금요일에 크레이트 박스를 열고 작품을 확인하려 했으나, 현장의 현실은 계획과 달랐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디지털 데이터로만 존재했던 도면과 실제 공간 사이의 간극을 점검하고 메우는 데 온전히 집중했다. 현장에서 추가로 구해야 할 물품들을 논의하고 주말 동안 해결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우리는 단순한 작품 설치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역사와 상처를 품은 아시아와 유럽 작가들의 목소리를, 독일과 체코의 경계에 자리한 이 실레지아의 땅, 수많은 제국과 이념이 스쳐 지나간 역사의 교차로 위에 온전히 세워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작품을 여는 행위는 월요일로 미루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저 크레이트 박스들이 열리는 순간, 우리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 서막이 성공적으로 올랐음을, 차가운 밤공기가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