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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제욱 Apr 01. 2019

성산 카일라스, 사카 다와 축제의 현장을 가다

스테디셀러, Nikon FM2





사진 입문자를 위한 교과서, Nikon FM2의 추억


90년대 사진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가장 유명한 카메라는 단연코 니콘 FM2였다. 요즘에는 과장하여 명기라고 표현한 글도 간혹 보이는데 과거에 절대로 명기로 불려지지 않았다. 니콘 FM2는 분명 대량 생산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이다. 그리고 그것이 강점이자 본질인 카메라이다. F시리즈와 달리 FM 시리즈는 사진 입문자를 위한 중저가 카메라였다. 1982년 발매되었고 모터 드라이브를 장착할 수 있다. 기존의 F 마운트에 있던 미터 커플링 레버가 제거되었다. 프로들은 서브 카메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니콤 패턴 셔터를 달고 있는 모델이 있고 데이터 백을 달 수도 있다. FM2, FM2T(티타늄), FM2n 세 가지 모델이 있다. 한국 아남에서 OEM으로 생산하여 아남 로고가 있는 모델도 간혹 보인다. 주로 실버 바디이지만 블랙 바디도 있다.  

역시 로망은 니콘 F시리즈이다. 삼각뿔의 모양을 가진 첫 번째 모델이 가장 아름답다. 

중산층 정도면 노려볼만한 대중적인 카메라였다. 좋은 가격에 불필요한 성능은 없는 단순해서 좋은 카메라이다. 정말 흔히 쓰는 표현처럼 성격이 FM인(Field Menual) 카메라이다. 모터 드라이브 등을 달면 F3 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야생미가 있었다. 그냥 모터 드라이브를 달고 공 셔터를 날리고 있어도 즐겁다. 주머니 사정이 좀 여의치 않는다면 보통 저렴한 10만 원대 초반의 펜탁스를 선택했다. FM2는 사진동아리, 혹은 미대생, 건축과 학생들이 특히 많이 사용했다. 학보사 기자들도 개인장비로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학생기자들은 아무래도 F3나 F80, F90이 많았고 주류 일간지 기자들은 F4 나 F5 같은 플래그쉽을 사용했다. 프리랜서들은 F2나 F3를 많이 썼다.( F3는 기능도 훌륭했지만 여차하면 망치로 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튼튼했다. 워낙 민주화 과정으로 데모를 많이 하던 나라였으니 현장에선 튼튼한 카메라가 최고였다.) 그렇게 FM2는 F5보다 두 레벨이 낮은 카메라였던 것이다. FM2는 90년대 바디만 50만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학기 등록금의 절반 정도 되는 돈이었다. 나는 물론 대학시절에는 펜탁스 ME Super를 사용했고 FM2를 가지고 있는 선배들을 부러워했다. AF 카메라는 보통 캐논을 선호했고 수동 카메라는 대부분 니콘을 선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수동 SLR 카메라를 생산했던 펜탁스, 미놀타 그리고 올림푸스 모두 훌륭한 카메라와 렌즈를 만들었다. FM2보다 훌륭한 카메라들 많다. 거의 비슷한 성능의 카메라를 만들었고 오늘날 명기로 재조명되는 모델들도 있다. 당시 한국은 너무 니콘에 편중됐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FM2의 단점을 일부 보완한 조리계 우선 기능이 달린 FM3A가 2001년 발매되고 2006년 단종되어 FM 시리즈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FM2는 2001년에 단종되어 잊혀져 가다가 연예인 배두나, 박보검의 카메라로 알려지면서 오늘날 유명해졌다. 


Nikon FM과 FM2는 외형과 기능상 큰 차이가 없다. 필자는 현재 FM에 라이카 R 렌즈를 이종교배로 사용한다. 


니콘 80주년 한정판. FM2

졸업한 후에 프리랜서 사진가로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겨우 20만 원대가 된 FM2와 제일 순전히 싸다는 이유로  12만 원짜리 28mm f2.8 렌즈 하나를 장만하게 된다. 조리계 우선 기능도 없고 눈금으로 노출만 알려주는 이 카메라를 초보자들이 많이 썼던 이유는 사진에 대해 공부하기 좋기 때문이다. 조리계와 노출, 감도 그리고 셔터스피드의 기능해 대해서 하나씩 집중하며 익히기 좋다. 다른 복잡한 기능이 없어 가장 기본기에 충실했다. 생긴 모습만 봐도 딱 그렇다. F3보다는 못하지만 파인더도 잘 보인다.  




카메라의 대중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SLR 카메라 시장의 성장 그리고 FM2의 디자인 
사실 니콘은 원래 독일제 콘탁스의 RF 카메라를 복제해 만들던 회사였다. 반면 캐논은 라이카를 카피했다. RF시절에도 콘탁스나 라이카 렌즈만큼이나 유명한 니콘, 캐논 RF 렌즈들이 몇 있다. 라이카는 오늘날도 인기가 많지만 콘탁스 RF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콘탁스 RF는 몇 렌즈를 제외하고는 가격도 낮고 전전 Pre War 모델은 멀쩡한 것을 구하기 힘들다. 전전 모델보다는 차라리 쏘비에트의 키에브를 쓰는 게 나을 정도. 오히려 니콘 RF는 충실한 마니아 층을 지금도 탄탄하게 형성하고 있고 가격은 라이카 M 시리즈보다 비싸다. 확실히 니콘 RF 바디는 원작인 콘탁스 RF를 넘어서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디자인도 아름답다. 

Contax-S 광고. 펜타프리즘은 혁명이었다. 니콘 F는 콘탁스 S의 계보를 잇는 카메라라고 볼 수 있다. 

콘탁스 RF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니콘 RF의 형태가 나왔고 이후 니콘 식 변주가 더해졌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무색무취라 오히려 기능에 믿음이 가는 독일 카메라와 달리 일본인들의 버전은 얌전하지만 톡톡 튀는 디테일이 있었다. 디테일에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색채감이 더해진 화려함이 있다. 니콘 SLR은 니콘 RF의 기본 바디 디자인과 최초의 펜타프리즘을 장착한 현대적인 SLR 카메라의 시초인 M42 마운트 동독 Contax-S의 형태를 복합적으로 따르고 있다. 아마 니콘은 Contax-S를 보고 인류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카메라 시스템이라고 직감했던 것 같다.(펜타프리즘 없이 SLR로의 첫 길을 열었지만 사라진 엑사타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고 니콘 F 시리즈에 계승된다.) RF 카메라의 문제는 화각이 정확하지 않았다. 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을 하면 실제로 찍히는 이미지와 차이가 생겼고 특히 망원렌즈들은 오차 때문에 거의 못쓸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SLR 카메라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성능도 좋았다. 무엇보다 렌즈가 받아들인 이미지를 미러와 펜타프리즘을 통해 실제 찍힐 사진을 미리 볼 수 있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RF처럼 대략적으로 화면을 추측하기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SLR 시스템의 망원렌즈는 양차 대전과 달리 게릴라전이 많았던 베트남 전쟁의 긴박한 상황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필름을 갈아 끼우는 것도 훨씬 편리해졌다. SLR 카메라는 RF에 비해 덩치가 크다는 편견이 오늘날 있지만 초창기 SLR들은 RF 카메라들과 비교해 크기가 크지 않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라이카는 R시리즈로 뒤늦게 SLR 시장에 뛰어들지만 바디의 성능이 일본 카메라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렌즈는 여전히 훌륭했지만 일본 카메라와는 가격 면에서 너무 불리했다. Contax-S는 만져보면 의외로 Contax RF 카메라와 거의 크기가 같다. 거기에 펜타프리즘만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펜타프리즘은 너무 어둡고 초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문제는 오늘날 사용이 가능한 상태의 이 카메라를 만나는 것은 거의 힘들다. 더 오래된 RF 카메라보다 오히려 내구성이 좋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SLR 카메라의 시대를 열고 콘탁스 브랜드 카메라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일본 야시카와의 합작으로 부활하기 전까지.  오늘날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도 니콘 Df로 이 니콘 F 필름 카메라 디자인의 미학을 이어가는 시도를 하였다.  물론 디자인이 살짝 흉내만 낸 수준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이카의 디지털 M처럼 니콘도 FM2, F1삼각뿔 그리고 F3 같은 모델을 그대로 디지털로 복각했으면 80-90년대 학번 마니아들이 크게 환호했을 텐데 Df는 큰 흐름을 만들지 못하고 약간의 시장의 호응이 있긴 했지만 너무 못생긴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하고 점차 잊혀지고 있다. 니콘 RF가 만약 디지털로 복각되고 콘탁스와 니콘의 RF 렌즈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천만 원이 넘어도-아마 차를 팔아서라도 살 환자들 주변에 수두룩 하다.  



FM2와 함께한 여정

아래 에세이는 FM2와 함께 2002년에 12년 만에 열리는 말띠 해 사카다와 축제를 취재한 결과물이다. 서부 티베트는 2001년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결과물은 시사저널, 월간 연합, 월간 아시아나 컬처에 다른 버전의 글과 사진으로 기고하였다. FM2는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지만 직업 사진가로서 슬라이드 필름으로 작업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프로가 쓸 수 있는 카메라였다. 슬라이드 필름은 반 스톱만 틀려도 보기 싫은 이미지가 나오기에 정확한 노출이 필요했다. 난 그저 선배에게 들은 한 가지만 기억했다. 손등에 노출을 재라. 그것만 기억해도 대부분 성공했다. 그런데 내 손등의 피부 톤이 보통보다 밝아 일부러 피부를 태워야 했다. 니콘 FM2는 가볍고 부피도 크지 않아 휴대하기 좋다. 떨어 뜨리지 않는 한 고장도 거의 없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카메라이다. 집안의 벽장을 잘 뒤져보면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쓰던 FM2가 발굴될 수 있으니 오늘 한번 찾아보라. 명기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신뢰가 가는 진짜 카메라다. 당시에는 지극히 젊고 현대적인 감각의 카메라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FM2도 고전이 된 것 같다. 2003년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청어람 미디어, 공저)'를 집필할 때 FM2는 신세대 카메라라고 여겼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이 서부 티베트를 주제로 한 작업물이 직업 사진가로서 취재를 하여 인쇄매체에 기고를 한 첫 작품이었다. 내 사진이 인쇄물에 실려 수십만 명의 독자와 만나던 순간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술작품으로 우아하게 갤러리 벽에 걸었을 때의 기쁨은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원고료도 당시 20대 중반의 나에겐 믿기기 않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카메라 몇 대를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 사진이 글과 함께 편집되어 종이에 인쇄되어 서점에 깔려 있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러한 종이 매체 산업은 아쉽게도 인터넷과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NIKON FM2>
출시년도: 1982년
스펙: https://www.lomography.com/magazine/273193-lomopedia-nikon-fm2
메뉴얼: http://cdn-10.nikon-cdn.com/pdf/manuals/archive/FM2.pdf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Nikon_FM2



 






1년 전 트럭 히치하이킹으로 가본 서부 티베트의 카일라스 산 입구에 위치한 다르첸 마을. 이번에는 성산 카일라스에서 열리는 사카다와 축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프를 아예 렌트했다. 작년의 경우 지나가는 이차 저차에 빌붙는 방법을 쓴 결과 비용은 절감할 수 있었으나 카슈가르에서 다르첸까지 무려 1달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이번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도시 코다리에 도착한 뒤 걸어서 국경을 넘어 티베트로 들어갔고 이곳에서 미리 준비시킨 랜드크루저를 탔다. 장무-니얄람-사가-파양을 거쳐 다르첸에 도착했다. 소요시간은 작년보다 훨씬 줄어든 4일이었다. 그래도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언덕을 수도 없이 넘고 영양 및 수면의 부족에 시달리며 티베트의 지독한 고산병과 싸워야 했다. 다이아막스(고산병 예방약)의 부작용으로 조금만 움츠리고 앉아도 마비가 되는 힘없는 다리와 손끝 찌릿함을 견뎌내면서 말이다. 

지난 5월의 어느 날 서부 티베트의 강렬한 햇살이 시들해질 무렵, 드디어 그토록 열망했던 다르첸 마을(해발 4675m)에 들어섰다. 축제일까지 닿을 수 있을까 마음 졸이던 필자로서는 기적 같은 짧은 시간에 축제를 하루 앞두고 도착했다는 것에 감격스러웠다. 다르첸은 상(티베트의 전통식물향) 연기로 자욱했다. 입구에서 보니 새벽안개와도 같은 짙은 연기 속에서 수많은 물체들이 소리도 내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서서히 안으로 다가가자 정체가 드러났다. 순례자들이었다. 다음날 거행될 사카다와 축제를 앞두고 오체투지를 쉬지 않고 반복하고 있었다.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고선 이 성스러운 의식을 쳐다볼 수 없었다. 참파(보리가루의 일종으로 티베트의 주식) 한 봉지에 의지해 1년간의 여정 끝에 이곳에 도착했을, 초라한 행색의 오체투지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기껏 4일간의 차량 여정에 나약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웠다. 


순례자만 4만 명, 고원에 끝없는 텐트

다르첸 마을은 사카다와 축제가 거행되는 성산 카일라스(불교, 힌두교, 뵌포교, 자이나교의 성산)로 가는 베이스캠프이다. 다르첸은 축제로 인해 1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인구라고 해야 기껏 2000-3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던 이곳은 순례자와 방문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평소보다 수십 배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대한 도시가 돼 있었다. 순례자들의 텐트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중국 정부의 공안과 인민해방군의 수도 크게 늘었고 이들을 상대하는 매춘부의 캠프도 자리 잡고 있었다. 축제 특수를 노려 현대식 한족 상점들이 여기저기 들어섰고 위성안테나로 작동되는 차이나 텔레콤 지국도 시야에 들어왔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순례자들은 서둘러 가축들을 점검하고 각자의 텐트에서 저녁식사를 위해 불을 피웠다. 티베트 전 지역에서 몰려든 다양한 전통의상의 사람들, 처음 접해보는 신기한 세상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 각자의 소중한 삶에 가장 특별한 체험을 모두들 만끽하고 있었다. 

‘사카다와’는 티베트력으로 4월을 의미하며 ‘붐 규르다와’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카’는 석가모니를 ‘다와’는 달을 뜻한다. 4월은 석가모니가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이룬, 티베트인들에겐 가장 성스러운 달이다. 매년 4월(양력으로는 5월) 기념행사가 벌어지며 이 한 달 동안 마을 입구나 언덕, 고갯마루, 다리, 바위 등에 내걸렸던 타르초(기도 깃발)를 새것으로 교체하거나 더 늘려 달기도 한다. 타르초는 죽은 자의 영혼이 안전하고 빠르게 천계에 도착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이자 개인의 소원 등을 하늘에 전달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각종 제물을 절 등에 공양하며, 육식을 하지 않고 구걸하는 자들도 돈 달라고 떼쓰지도 않고, 돈을 받아도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다. 이 기간의 선생에 따라 부처로부터 상벌이 내려진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며 성스러운 일을 하도록 노력하고 살생과 범죄를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 카일라스는 산스크리트어로 ‘시바의 천국’이란 뜻. 힌두교나 외부 세계인들은 카일라스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티베트인들은 이산을 ‘강 린포체’(눈의 살아 있는 부처란 뜻의 단어로 강은 雪, 린포체는 活佛을 각각 의미한다.)라고 부르며 ‘카일라스’라는 단어는 아예 알지도 못한다. 

원래 이 산은 기원전 2세기부터 명맥을 이어온 티베트의 전통 샤머니즘 종교인 뵌포교의 성산이었다. 12세기 초반 이 산을 방문한 불교 성자이자 티베트를 대표하는 시인인 밀라레빠(1052~1135)가 뵌포교 승려인 나로뵌충과 그 소유권을 두고 대결을 벌여 승리, 이후 카일라스는 불교도 들의 성산이 된다. 이로부터 불교가 티베트 도원에서 뵌포교를 제치고 주도권을 차지하게 됐다. 


티베트 독립 행사 우려 중국 공안 단속

축제 당일에 취재를 위해 일찍 감치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이곳에서 알게 된 티베트인이 갑자기 필자를 붙잡더니 몸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유인 즉 이 성스러운 행사를 위해 많은 티베트인들이 모였는데 그중에는 티베트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 조직원들도 상당수와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나를 한족으로 오인해서 공격하고 카메라를 뺏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신앙심 깊은 티베트인들이 모이는 행사이기 때문에 독립을 휘한 정치적 행사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어 중국 공안의 단속도 심하였다. 

행사장인 카일라스 ‘코라’의 입구를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만들어져 있었다. 코라는 카일라스를 한 바퀴 도는 순례자의 길로 이 다르첸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티베트인들과 함께 한걸음 한걸음 전진했다. 코라 입구에는 ‘타루포체’라 불리는 25m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있었다. 타루포체란 타르초를 달기 위한 기둥인데 최초의 것은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였던 구루 린포체의 예언에 의해 인간의 힘 없이 스스로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타루포체를 새 것으로 교체하는 행사야말로 사카다와 축제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오전 10시, 전기 충격기로 거칠게 위협하는 공안의 호위를 받으며 30명가량의 승려들이 행사장 앞으로 들어섰다. 대표 승려가 한 손에 도르제(금강저, 金剛杵)를 들고 경전을 낭독하자 카일라스 산을 향해 바닥에 누워있던 타루포체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2시간에 걸쳐 직각으로 세워지자 승려는 이 구조물의 기중 밑 부분에 성수와 창(티베트 전통주)을 뿌리면서 기도를 드렸고 동시에 기다란 티베트 나팔(둥첸), 징(롤모), 북(초스룽가)이 연주되며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이곳에 모여든 모든 티베트인들의 과심은 일단 직각으로 세워진 타루포체가 직각을 그대로 유지할지, 아니면 옆으로 기울지에 쏠리게 된다. 그것에 따라 미래의 길흉이 점쳐지기 때문이다. 만약 타루포체가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으면 질병이 낫게 되고 가축이 건강해지며 모든 사람이 성공하는 등 만사가 잘 풀린다고 생각한다. 타루포체가 카일라스 산을 향해 기울어지면 주민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괴로워하게 되고 일찍 죽게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산의 반대편으로 기울면 커다란 재앙이 다가온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의식이 끝나자 승려들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행사장은 한동안 혼란스러워졌다. 승려들은 티베트 전통 텐트로 만든 간이 곰파(절)에서 순례자들을 한 명 한 명 맞이하여 축복해주었다. 또 전통의상을 입은 티베트인들의 기마 시범과 전통무용 공연도 이어졌다. 


코라 순례하면 전생의 업도 소멸

본 행사가 끝나자 참가자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성스러운 날을 보냈는데 어떤 이들은 참파 가루를 하늘에 뿌리는가 하면 행사장 뒤편으로 가 티베트 고유의 장례법인 천장을 지내는 드라촘 언덕 위에서 자신의 생머리를 일부 잘라내고 입술을 약간 베어 피를 내고 돌을 깨물어 이빨을 부러뜨린 후 신에게 공양했다. 자신의 일부를 남기는 행위를 통해 천국에서 환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믿음에서 오는 행위들이었다. 바위에 대자로 누워 죽음을 체험하는 사람, 타루 포체를 직각으로 세우는 데 사용한 나무기둥을 성물로 간직하기 위해 조금씩 떼어가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각종 행사가 마무리되자 순례자들은 ‘코라’ 돌기에 나섰다. 코라는 해발 4675m의 다르첸 마을에서 시작하여 5600미터의 될마라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 않다. 한 바퀴 도는데 도보로 보통 2박 3일 걸린다. 순례자들은 축제일을 전후해 코라 돌기를 시작한다. 코라 돌기는 자신의 업을 소멸시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에게는 평생의 과업이다. 한 바퀴 돌 때마다 업이 소멸되는데 3번 돌면 전생의 업까지, 108번을 돌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에겐 한 번의 순례 조차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특히 말띠해의 사카다와 기간에는 코라를 한번 도는 것이 평년의 12번에 해당한다는 믿음 때문에 더더욱 많은 순례자들이 찾게 된다. 이 기간에 카일라스까지 못 오는 이들은 라싸의 조캉사원과 포탈라궁을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코라인 ‘링콜’을 돌게 된다. 

행사 다음날 갑자기 눈이 내렸다. 몇몇 네팔, 인도팀들은 결국 코라 구경도 못하고 자국으로 돌아갔으며 필자와 동행했던 팀에서도 2명의 환자가 발생해 애를 태워야 했다. 다음 날이 되자 그 많은 눈이 완전히 녹아버려 눈이 내렸었다는 사실조차 증명하기 힘들었다. 카일라스의 갑작스러운 폭설은 혹독했지만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카일라스 북면은 혼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설경을 기억 속에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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