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에 숲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숲속에 호수나 연못도 함께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전주의 덕진동과 송천동과 호성동에 걸쳐 있는 산이 있다. 건지산. 보기 드문 산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높이가 고작 99미터에 불과하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배기라고 해야 더 적합할 듯하다. 산이라면 높아야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S 또한 그런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전주에 살면서도 가까이에 위치한 건지산을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건지산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어도 어디에 있는 곳인지조차 몰랐다. 가끔씩 산 안에 자리한 <동물원>이나 <소리문화의 전당>이나 <체련공원>에 놀러갔으면서도 산 이름조차 몰랐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비져나온다. 얼마나 무심하게 살아온 것인가 나는, 하고 탄식하게 된다.
이십대, 삼십대의 청춘시절엔 낯선 곳에 대한 동경, 화려하고 높은 것에 대한 갈망이 강했다. 가까이에 있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특별할 것이 없는 곳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봄에는 벚꽃이나 철쭉꽃이 화려하게 피어난 곳을, 여름에는 유명한 해수욕장이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곳을, 가을이면 단풍이 흐드러진 곳을, 겨울엔 설경이 아름다운 곳만을 떠올리며 살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런 곳에 갈 때마다 밀려든 사람들로 인해 늘 피곤한 여정이었다. 벚꽃이나 철쭉꽃이 아름다운 곳을 여름, 가을, 겨울엔 찾지 않았다. 유명한 해수욕장이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곳을 여름 말고 다른 계절엔 가지 않았다.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애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욕망의 대상이었다.
유명하다고 해서, 화려하다고 해서 마음이 쏠리는 현상은 타자의 욕망을 좇는 삶이다. 그것은 유행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유행을 좇는 삶엔 자기만의 중심이 없다. 대세에 휘둘리며 사는 삶이다.
사람끼리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는 관계없이 잘나가는 소수만을 바라보고 선망하게 되면 주변에 사는 다수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 화살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실체의 소중함을 못 보고, 멀리 있는 허상에 휩쓸린 채 살아간다. 가까이 있는 대상에게서 늘 새로운 면을 발견하려는 자세야말로 참된 삶의 지침이 아닐까 싶다.
사십대가 되어서야 S는 건지산을 ‘발견’했다. 유명한 관광지에 비하면 특별히 내세울 만한 거대함이나 화려함은 없지만, 늘 가까이할 수 있는 대상의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가볍게 걷는다. 하루, 이틀, 사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아, 이곳에 플라타너스 숲이 있었구나! 아, 이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구나! 한 달, 두 달, 석 달……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단 한 순간도 같지가 않다. 매일 날씨도 다르고, 오고가는 사람들도 다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숲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색깔과 소리가 다르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때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경치도 다르다. 아침에 산책할 때와 해질녘에 산책할 때의 빛도 다르고 기분도 다르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탐험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건지산의 명소 중의 하나는 편백나무 숲이다. 사계절 푸름을 잃지 않는 편백나무 숲 그늘에 앉아 가끔씩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는다. 늘 쫓기듯 살아가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향긋한 숲의 내음에 몸을 맡긴다. 그러면 고민거리였던 문제의 해답이 불시에 떠오르기도 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이 몸 안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숲이 안겨주는 마력이다. 빨리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멈춤’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숲이 나지막하게 속삭여주는 듯하다.
또 하나의 명소를 꼽자면 산 안에 자리한 오송제라는 이름의 조그마한 연못이다. 크기는 작지만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며, 각종 물고기가 서식하고, 온갖 새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특히나 여름이면 초록빛 바탕에 분홍빛과 흰빛의 연꽃들이 피어나 화려한 그림을 펼쳐 보이고 그윽한 향기까지 선사한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한 바퀴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가끔씩 카메라를 둘러메고 와서 사진을 찍어 왔지만 오송제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었다. 어디 그것이 오송제에 국한된 것이겠는가. 아무리 기술문명이 발달해도 자연의 신비 앞에서 인간은 작아진다. 아니, 작아져야 한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고방식이 불러일으킨 결과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 없이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명심하고 살아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