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오후 #1

by 이룸


1


그 일요일에 월하리(月下里)에 간 것도, 그곳에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녀를 만나러 그곳에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이나 영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간절한 그리움으로 자리 잡을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월하리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간혹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밖으로만 얼핏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그곳의 시외버스 정류장과 기차역 중간쯤에 벚나무가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길이 있었다. 사람이라곤 다니지 않는 한적한 오솔길. 버스를 타고 지나치면서 별 생각 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그 일요일 아침, 밥을 먹고 나서 음악을 듣던 중 무심코 그 오솔길이 아련히 떠오르는가 싶더니, 가서 거닐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마치 잊지 못할 추억이라도 새겨진 양 그곳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 가고 싶다, 가고 싶다…… 마음은 그렇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약속도 없던 차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이거 웬 시답잖은 감상인가, 하고. 가 보았자 별 것 없을 게 뻔해, 하고. 차라리 영화관이나 가는 게 어때, 하고.

마지못해 떠밀린 듯 버스에 올라타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화로워졌고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건대 꽤나 오랫동안 시외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일상에 매몰된 채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가끔씩 직장동료와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치고, 혼자 있을 땐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영화를 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사십여 분이면 되는 월하리에도 여태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또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사실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특별히 가야 할 사정이 있었던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내를 벗어나자 논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점인 월하리에 접어들었다. 시내버스와 시외버스 모두 같은 정류장을 이용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버스를 타고 스쳐지나가면서 바라본 모습하고 버스에서 내려 직접 바라볼 때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른쪽이었던가, 왼쪽이었던가, 앞쪽인가, 뒤쪽인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역이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횡단보도를 막 건너 몇 걸음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라고 한 것도 같았고 이봐요, 라고 한 것도 같았고 이름을 부른 것도 같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여자가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눈을 조아리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나 했는데, 맞구나. 이게 얼마만이야.”

그녀는 환하게 웃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해글해글 웃어 보이며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낯섦과 반가움이 섞인 어조로 나는 말하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 그냥…….”

“그냥?”

“누나는요?”

“난 여기 살아. 어디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자. 급한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이쪽엔 없어. 밥집하고 술집뿐이야. 학교 앞으로 가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환하게 웃음을 흘렸다. 눈 밑으로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까마득한 날들이었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고3, 그리고 암흑이었다. 대학입시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저당 잡힌 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생활에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2년 동안은 그런 대로 버텨왔지만 3년째가 되자 금방이라도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숨통이 필요했다.

나는 매일처럼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살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 전국일주를 해보고 싶었고, 배를 타고 일본이나 호주나 칠레 같은 곳을 가보고 싶기도 하였다. 공상은 자꾸만 부풀어 올라 남극이나 북극으로 뻗어나가기도 했고, 지구를 벗어나 화성이나 목성, 저 멀리 안드로메다나 카시오페이아 같은 별들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내가 감행한 모험이라곤 기껏해야 저녁 자율학습 시간을 빠져나와 도시의 곳곳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것에 불과했다. 가끔씩은 오락실이나 피시방이나 만화방에 들어가서 시간을 때웠다. 다시 집으로 향할 때면 절로 한숨만 나왔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거리를 걷다가 전봇대에 붙은 연극 포스터를 보았다. 약도를 보니 가까운 곳이었다. 딱히 갈 곳도 없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소극장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공간이었다. 자리라고 해봐야 50석이 될까 말까 했다. 무대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짤막한 연극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연극이었기 때문에 내용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연극을 다 보고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뿌듯하기만 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데서 오는 뿌듯함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드러누워 나는 다시금 그 소극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연극의 줄거리를 더듬어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하는 모습만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특히나 주연 여배우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그마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열정적인 목소리와 몸짓. 아니, 그것은 열정을 넘어서 소름끼치게 만드는 광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내가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는 것들을 그 여배우는 온몸으로 내뿜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로부터 대학입시가 끝날 때까지 두 번을 더 소극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내게 낯설게 느껴지는 세계였다. 공상 속에서 찾아다니던 이름 모를 별들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떨어지고 나서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연극배우를 모집한다는 소극장의 벽보를 보았고, 나는 선뜻 그곳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분명 연극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연극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고 관심도 미미했다. 배우들의 힘찬 몸짓, 특히나 그 조그마한 여배우의 펄펄 끓는 열정을 나 또한 갖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고등학생이던 우리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우리들. 그러나 축 쳐진 어깨의 우리들, 희멀건 얼굴의 우리들,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 같은 표정의 우리들. 그러나 그 소극장에는 그런 신물 나는 우리들의 모습이 없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넘치는 에너지가 있었다. 나는 그런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이 더 많았고,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는 3학년 학생이었다. 분장을 지운 맨얼굴의 그녀는 허약해 보일 정도로 여려 보였다. 그러나 일단 분장을 하고 무대에만 오르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그런 대조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신기했고 즐거웠다. 다른 사람들은 평소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녀만은 확연히 달라 보였다.

청소를 하고, 심부름을 하고,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2개월이라는 시간이 휑하니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내가 지금 여기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집에다가는 학원에 간다고 나와서 줄곧 그렇게 지내고 있던 터였다. 그해 봄 그녀가 다가와 ‘데이트나 하자’고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더 이상 소극장을 찾아가지 않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