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커피숍에 들어가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그동안’이라는 건 내가 소극장을 나온 뒤부터 지금까지가 될 것이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모든 희망과 꿈이 날개를 접고 일상의 잔잔함만이 남았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통계학과를 나와서 호텔의 전산부에서 일하고 있다고, 매일처럼 수입과 지출을 더하고 빼는 지극히 단순한 일을 하고 있다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누나는요?”
“난…… 글쎄…….”
그리고 그녀는 입을 다물고 눈을 치켜뜬 채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어.”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 일일이 말하자면 너무 길어서, 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연극은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잠시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대학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어.”
왜요? 라고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온통 ‘연극’이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되었다. 짧았던 과거의 기억으로 그 이후의 긴 시간을 섣불리 판단하려는 나의 태도가 우습게 여겨졌다. 그녀는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실내에서는 잔잔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난 참 힘들었어.”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음미하듯 마시고 나서 말했다.
“옷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던 날들이었지.”
짧게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런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 비슷한 식으로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그녀답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부인의 말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위장이었을 거야. 그래, 위장이었지. 힘들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어떻게든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래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결혼은……?”
나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직 안 했어.”
그러면서 그녀는 홋, 하고 웃어보였다.
“왜, 결혼한 것 같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바빴어. 대학 졸업하고 나서 학원 강사 하면서 과외도 하면서…… 그러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고…… 아무튼 이래저래 바빴지. 그러다 보니 금세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부르고 나서 시선을 나에게로 돌리며 생긋 미소를 머금었다.
“넌?”
“뭐가요?”
“결혼.”
“저도 아직.”
“그럼 우리 둘, 가능성이 있는 거니?”
그녀가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고, 나도 작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어떠세요?”
“뭐가?”
“지금은 힘들지 않으세요?”
“으음…… 그럭저럭 괜찮아. 그땐…… 안개 낀 오전이었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몸부림친 거지, 길을 찾기 위해.”
안개 낀 오전이라……. 그녀의 낯선 비유에 잠시 내 머릿속에 안개가 끼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 날씨예요?”
“지금 내 나이가 서른셋이니까…… 불투명한 오후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 이제 막 오후로 접어들었고, 많은 것이 눈앞에 보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흐릿해. 그리고 옛날과 같은 열정은 이제 없어. 그저 맑은 날씨로 바뀌길 바라며 기다릴 뿐이야.”
한없이 서글퍼지는 말이었다.
4
그녀는 늘 바빠 보였다. 연극이 끝나고 회식이 있을 때에도 몇 분 앉아 있다가 나가는 식이었다.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학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 말고도 그곳에는 두 명의 학생이 더 있었다. 그녀는 유독 연습시간이나 공연시간 이외에는 소극장에 모습을 잘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는 2개월이 지나도록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날, 눈부시게 화창하던 5월의 어느 날 그녀가 문득 다가와서는 데이트나 하자는 것이었다.
“어디 가고 싶니?”
어디든,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동물원 가고 싶은데, 어때?”
“좋아요.”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버스 안에서도 그녀는 시종 어린아이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어느 중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계통의 학과를 지망할 것인지 따위를 물어왔다. 그녀의 옷깃이 스칠 때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때마다 내 심장은 쿵쿵 울려대고 있었다.
동물원 안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초등학생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흐드러지게 웃어 보이곤 했다. 그녀의 또 다른 모습 때문에 나는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혹시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것이 그녀의 본래 모습인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였다.
“너무 좋다. 가끔씩은 이렇게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마음껏 뛰어다녀야 해. 그렇지 않니?”
나는 그저 반사적으로 미소를 내보였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습니다, 라고. 당신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우리에 갇힌 동물들 보면 불쌍해 보이지 않니?”
원숭이 우리 앞에서 그녀는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불쌍해할 것 없어. 인간도 마찬가지니깐. 그렇게 생각지 않니?”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피익 웃었다.
“인간들도 다 제각기 자신만의 우리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거야. 물론 우리의 크기엔 차이가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걸 제대로 인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거야. 슬퍼하는 사람은 그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끝없이 부딪쳐 보는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도 있어.”
나는 분명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러나 귀로는 와 닿지만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말들이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고작 세 살 차이였지만 그녀는 도달할 길 없는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욱 열심히 소극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저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뭔가 해보고 싶어졌다. 대본을 들고 달달달 외워보기도 했고, 선배 연기자들을 흉내 내며 무대 위에서 동작 연습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