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이 세상에서 환영받을 때는 고객이 될 때뿐이다. 손님으로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고객으로 포섭하기 위해 사람들은 마음에 없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넨다. 백화점에서 은행에서 마트에서 식당에서 그 어느 곳에서든……. 물론 피고용인은 고용인의 눈치를 보며 미소를 짓는 것이다. 고용인에게 밉보이면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최대한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있는 미소 없는 미소 동원해야 한다. 같은 업종일 때 나를 좀 더 환대해 주는 곳으로 사람들은 쏠리게 마련이다. 당연히 내실(內實)이 우선이다. 내실 없는 친절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니까. 내실이 갖춰진 상태에서 친절은 플러스알파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붙임성 좋은 사람은 이 세상을 훨씬 순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눈물 나는 노력이 요구된다.
노동에서 놓여나면 억압된 감정을 마음껏 풀고 싶어진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감정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각자가 상대방의 스트레스를 받아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픈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쉽지 않다. 오히려 억압된 감정이 폭발하여 심심찮게 다투게 된다.
대개 여자의 경우, 쇼핑 중독에 빠져드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마음을 터놓고 감정을 교류하기 힘든 세상, 그래서 외로움과 우울감이 쌓여가는 세상에서 쇼핑에 발을 들여놓으면 언제든지 환영받고 대접받는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시적일지라도. 남자들이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에 가는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의무와 책임에 짓눌린 채 살아가다가 왕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핑이나 술 접대에 빠져들수록 외로움과 공허감 또한 부풀어 오른다. 게다가 그러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다시금 감정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악순환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문제가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권태감이 커진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옛날 같으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볼 수 없는 사람들을 현대인은 하루에 다 보며 살고 있다. 옛날 같으면 100년이 지나도 변함없을 공간이 현대에는 10년도 지나지 않아 몰라보게 달라진다. 세상은 정신없이 변해가고, 그에 따라 현대인은 사정없이 쫓기며 살아간다. 가만히 있으면 시대에 뒤처지는 것 같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뇌수에 박힌다.
매체의 발달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 환경은 사람들을 더욱 정신 사납게 만든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맥락 없이 흘러들어와 머릿속을 쉴 새 없이 휘젓고 다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어지럽다. 평온한 삶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 너무도 많은, 너무도 현란한, 너무도 잔인한 사건들을 보고 들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이제 웬만한 사건 앞에서는 무감각해진다. 그럴수록 매체들은 더욱 자극적인 내용을 내보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매체 속의 현란한 사건들에 눈과 귀를 빠트리고 있다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너무 초라하고 단조롭다. 외롭다. 공허하다. 그 공허함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다. 그리하여 다시 쇼핑이나 술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허깨비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단조로운 일상을 견디기. 더 나아가서는 단조로운 일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던져진 지상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꼭 필요한 소비만 하고, 남는 시간에는 돈이 매개 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마음을 터놓는 교류가 필요하다. 그리고 외로움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자신만의 비법을 개발해야 한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외로움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S는 부끄럽기만 하다. 자신이 설정한 지상의 과제에서 한참 벗어난 삶을 살고 있을뿐더러,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과연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인식과 성찰을 넘어 실행으로 옮겨가야 하는데, 실행은 여전히 쉽지가 않다.